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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동생만 있으면 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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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의 창문을 바람이 흔들었다. 부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일단 멈추고 밖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늦게 핀 벚꽃이 봄의 끝을 아쉬워하듯 팔랑팔랑 이별의 춤을 피로하고 있었다. 이미 4월도 중순을 지나 훈풍이 부는 계절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 곧 고교 마지막 봄이 끝난다. 아니 봄 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앞으로 1년이 남지 않은 것이다.


대학수험까지 이제 10개월도 남지 않았다. 대학입학 공통 테스트는 앞으로 9개월 남았다. 어, 큰일났네 뭐야 그게. 이제 진짜 시간이 없잖아. 진짜 장난 아니다.


수험을 감안하면 시작하는 게 늦었다 뿐일까 때가 늦어버렸을 정도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부에 손을 대야한다고 머리는 이해하고 있는데 좀처럼 몸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헷헷헷 입으로는 뭐라고 말한들 몸은 솔직하군...분해! 움찔움찔!


하지만 아무리 내 몸이 이기적인 몸매의 솔직한 사람이라고 한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좀 그렇다. 느닷없이 본격적인 수험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허들이 높지만 준비 정도는 해둬야겠지.


그런 이유에서 방과후 부실에 가기 전에 진로지도실에 들려 예비교의 팸플릿을 닥치는대로 모아왔다. 어차피 그 부활동은 말도 안 되게 한가하다. 얼마든지 고민해볼 시간은 있다. 뭣하면 시간때우기에 딱 좋다...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편이 낫지 않냐?


한순간 제대로된 사고가 머리를 스치고 말았지만 그걸 떨쳐내고 나는 부실의 문고리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철컥하고 문을 열어보니 익숙한 풍경이 그곳에 있다.

청초한 손놀림으로 홍차를 타는 유키노시타 유키노, 가방에서 센베를 꺼내들어 접시에 한가득 담고 있는 유이가하마 유이. 그리고 두사람 맞은편에 앚아 턱을 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은 부원도 아니면서 어째선지 부실에 있는 잇시키 이로하. 잇시키의 존재는 다소 이레귤러였지만 그래도 뭐 자주 있는 광경이다.


한가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른 것은 잇시키 옆에 내 여동생 히키가야 코마치가 있는 점일 것이다. 아주 새로운 교복을 몸에 걸치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테이블 쓱싹쓱싹,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의 컵을 나열하고는 또 새로운 종이컵을 꺼내며 바지런하게 일하고 있다.


아무래도 신임 부장의 지휘 아래 봉사부는 새로운 체제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언젠가는 이 홍차의 향기도 계승되어 코마치가 홍차를 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잇시키 양은 뭘 하고 계신가요? 홍차를 마시러 온 손님이신가?


그 잇시키가 문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아 선배 늦어요!'


우우하고 요망커엽게 볼을 부풀리는 잇시키한테 오냐오냐 미안하다라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음 나는 정위치로 향했다.


'힛키 얏하로'

'안녕'


유이기하마는 흔들흔들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유키노시타는 내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어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오냐, 고생한다'고 짧게 답례인사를 하고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유키노시타가 내 앞에 따뜻해 보이는 김이 나고 있는 찻잔을 놓는가...싶은 그 순간.


'아 유키노 언니, 잠깐 기다려요'


코마치가 제지를 했다.


'어? 왜, 왜그러니?'


갑자기 제지당해 당혹스러워 하는 유키노시타를 향해 코마치는 조금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오빠한테는, 아직 좀 이른 것 같아서요'


'그, 그래...확실히 히키가야 군은 아직 홍차의 맛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그렇다고 혼자만 찻잎의 등급을 낮추는 것도...'


그렇게 말하면서 유키노시타의 시선은 힐끔힐끔 홍차를 저장해둔 곳을 향했다.


'으음...아무리 봐도 오빠용으로 싸구려 찻잎을 준비해놓은 느낌...'


코마치는 역시 유키노 언니...라고 말하는 듯한 미묘한 표정이었다. 뭐 실제로 나는 홍차의 맛 차이를 잘 몰라서 유키노시타의 준비는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전용이 있다는 그 상냥함에 살짝 감동해버린다고.


'....맛이 아니라 온도 얘기였거든요. 에헤헤...'


'온도....아...'


유이가하마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무슨 소린지 짐작이 갔는지 흐하하고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유키노시타도 거의 동시에 끄덕였다.


'그렇지, 고양이혀였지.'

'두사람 다 정답~ 두구두구둥!'


코마치는 생끗 웃는 얼굴로 짝짝 박수를 치나 싶더라니 금세 심각한 얼굴로 손가락을 흔들며 해설을 시작했다.


'우리집 사람은 대체로 다들 고양이혀라서 홍차는 살짝 차가운 정도가 취향이에요. 그리고 홍차가 스트레이트일 때의 다과는 달콤한 걸 추천해요. 꼭 기억해주신다면 코마치 포인트가 높아요'


'그, 그러니...다음부터는 신경쓸게...아니 신경쓸게요'


'갑자기 존댓말!? 그치만 그렇게 되는 심정은 조금 이해돼!'


유키노시타가 면목없다는 듯이 트레이를 가슴에 품고 끄덕이자 유이가하마는 쭉하고 허리를 핀다.

한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잇시키는 정색을 하고 있었다.


'우와 콩순이 그거 완전 시누이잖아...그런 거 무지 성가셔서 질색인데요...'


'울컥...뭐 이로하 선배는 딱히 기억 안 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집 페트병에 담긴 차는 따지지 않거든요. 어떤 메이커든 괜찮아요! 잘됐죠!'


'아니아니 아무리 그래도 차쯤은 직접 탈 수 있거든. 유키노 선배 남는 찻잔 있어요? 콩순이한테 대접하고 싶은데요.'


'그건 이미 그냥 펄펄 끓는 백탕! 코마치 고양이혀니까 그러지마세요!'


잇시키가 펄펄끓는 포트를 향해 손을 뻗으려 드는 것을 코마치가 필사적으로 말린다.

그 티격거림을 곁눈질로 보면서 나는 아직도 김이 서려있는 찻잔에 손을 뻗었다.

딱히 차가 뜨겁건 다과가 뭐건 간에 상관 없는 것이다.

집은 집, 부실은 부실.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나는 뜨거운 찻잔에 후우후우 숨을 내쉰다음 홀짝홀짝 마시고 센베도 으적으적 씹었다.


'음 뭐 맛있다. 차도 다과도 뭐든 맛있으니까, 뭐든 괜찮군...'


작은 탄식과 함께 투덜거리듯 말하자 같은 라인에 앉은 유키노시타와 유이기하마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문뜩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뭐든지 괜찮다가, 제일 곤란하지만'

'정말루'


둘이서 킥하고 미소를 주고받는 그 한편에서 맞은편에 앉은 두사람은 뭔가 소근소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왔다, 영악한 짓...'

'뭐 오빠는 항상 저런 식이라서...'


방금전까지 둘이서 요란법썩을 떨었으면서 비밀 얘기 잘해봐요 하는 떨떠름한 얼굴을 바짝붙여 귓속말을 주고 받은 다음, 내쪽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참으로 불편해서 나는 신문을 펼친 쇼와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예비교 팸플릿을 부스럭부스럭 펼쳤다.


'힛키 그게 뭐야?'

'아까 진로지도실에서 챙겨왔다. 볼거냐?'


흐에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유이가하마에게 팸플릿을 몇갠가 건네자 유이가마는 그것을 허겁지겁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이가하마 옆에서 유키노시타도 엿보면서 흐음흐음하고 문자열을 눈으로 좇았다.


이런 종류의 자료니 팸플릿은 요즘이야 웹에 얼마든지 실려 있지만 누군가와 같이 보거나 펼쳐놓고 비교하는데는 여전히 종이 자료 쪽이 빠른 길이다.


심지어 잇시키랑 코마치도 맞은편에서 우리도 보여달라는 기세로 손을 뻗어대기에 휙 던져서 책상위를 슬라이딩시켰다. 그걸 언뜻 보고는 잇시키는 진이 빠진 목소리를 냈다.


'하아 벌써 수험 얘긴가요. 큰일이네요.'


'대놓고 남일이구만...너도 내년에는 고민하게 될거다.'


내가 말하자 옆에서 몹시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나두 지금 무지 고민중인 걸...'


옆을 보니 유이가하마가 추욱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팸플릿에 시선을 떨구고 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무겁구만...'


하지만 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유이가하마답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붙은데 갈까~정도밖에 생각 안 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끄덕 끄덕이면서 팸플릿을 비교하는 유이가하마를 차마 볼 수 없었는지 유키노시타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대학선택이 꼭 장래의 진로에 직결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으, 으응...그렇기는 한데...역시 고민하게 돼~'


유이가하마는 으앙하고 유키노시타한테 안겼다. 거기에 유키노시타는 '가까워...'라고 푸념하면서도 노트북을 끄집어내어 타닥타닥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유이가하마 양이 가고 싶은 대학이나 학부를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유키노시타랑 유이가하마가 어깨를 맞대고 이것도 아냐 저것도 아냐라고 말을 하면서 대학이니 뭐니를 조사하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흐음흐음하고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코마치가 불쑥 잇시키를 돌아봤다.


'이로하 선배는 어디 가고 싶은 대학이라도 있나요?'


'음...역시 유명대학? 아오가쿠나 죠치나 릿쿄 정도?'


'오오~ 굉장해! 표현은 머리 나빠 보이는데, 머리 좋은 대학을 노리고 계시네요!'


'하? 어차피 대학에서 공부 안 하는데 머리 좋은거랑 관계 없지 않니? 잘꾸미고 예쁜 게 더 중요하지'


'오,오우...코마치 이로하 선배를 조금 얕보고 있었어요...이정도 경지까지 오르면 오히려 멋있네 이 인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잇시키에게 코마치가 전율했다. 아니 나도 조금 지렸다. 이로하스는 훌륭할만큼 이미지만으로 논하고 계신다...


하지만 뭐 생각의 실마리로는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도 패미마에 갈 때마다 테이쿄 헤이세이 대학(※치바에 있는 F랭크 대학. 패밀리마트 점내 CM으로 유명하다)에 갈까 생각하게 되고 면허는 합숙면허 WAO!!로 딸까 생각하게 되는 걸...아니 정말로 그 광고는 무지 머리속에 남는단 말이지...그야말로 각인이라고 할까 서브리미널 수준이라 반쯤 세뇌다.


그리고 옆에서 또 별개의 세뇌를 받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지명도, 유명대학, 꾸밈...'


'유이가하마 양 현혹되지마. 견실하게 고르자. 그러지마, 인카레(※인터 칼리지. 대학간 스포츠 대항전. 연고전 같은 거 ㅇㅇ)니 오란(※올라운드 서클. 동아리의 활동영역이 스포츠, 여행, 대학행사 참여 등 모든 부분을 커버한다는 의미)처럼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검색하는 건 그만두렴. 왠지 무척이나 불안해지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유키노시타는 유이가하마한테서 노트북을 빼앗아 나한테 패스했다. 잘했다 유키노시타. 나도 유이가하마의 앞날이 왠지 무척 불안해졌기 때문에 열려 있던 탭을 속공으로 닫아버릴랍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라고 잇시키를 찌릿하고 노려보자 잇시키는 얼버무리듯 콜록콜록 헛기침을 하고서 코마치에게 관심을 돌렸다.


'콩순이는 어때? 대학 어디갈지 생각해봤어?'


'코마치는 오빠의 실패를 보고나서 정할까 해요!'


'에엑...내가 실패하는 게 전제...'


코마치는 방긋 울트라 스마일로 활기차게 만세 포즈. 너무도 당당한 선언에 내 어깨가 축 쳐진다. 하지만 뭐 손위 형제의 실패를 보고 배우는 것은 동생의 특권이다. 모쪼록 결실 있는 실패를 하자.


'뭐 코마치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려나...'


쓴웃음 섞어가며 내가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끄덕인다.


'응, 코마치 쨩 아직 1학년인 걸. 아직은 실컷 놀 수 있어!'


'그대목에서는 공부하는 걸 추천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울컥해서 양주먹을 가슴 앞에 들고 콧김 씩씩거리는 유이가하마를 상대하랴 유키노시타는 살짝 지친 탓에 한숨을 쉰다.


'코마치는 됐다치고 잇시키는 어떠냐. 괜찮은거냐. 성적 같은 거'


'저말인가요? 하아, 뭐어. 저는 지정교 추천으로 갈 생각이니까요...'


'오 지정교 추천. 좋네요 그거!'


코마치가 굉장하다며 짝짝짝 박수를 치자 잇시키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추켜세웠다.


'흐응 괜히 학생회장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콩순이도 추천 노려보지? 머리 나빠보이는데'


'우와 무슨 말을 하는거람 이 사람 진짜 쩌네...하지만 지정교 추천이란 말은 매력적이라서 코마치도 학생회장 노려볼까나 지금 생각했습니다. 올해 선거에서 박살낼래요.'


'하핫 질 것 같지가 않은데'


'올해 선거가 기대되네요, 우후후'


잇시키가 코웃음 치자 코마치가 생긋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대로 조용히 노려보는가 싶더라니 갑자기 잇시키의 미소가 사라졌다.


'....어 잠깐? 진짜 선거에 나올 거 아니지? 선배들이 콩순이를 응원하면 저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데요...'


'글쎄 어떨까요...그치 오빠?'


'어쩌실건가요, 선배...'


코마치가 응석부리는 듯한 음성과 녹아내를 듯한 미소로 나를 부르자 잇시키는 불안하다는 목소리를 울려서 기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빠야♪'


코마치의 천진난만한 음성은 튀어오르듯 명랑했고 초롱초롱한 반짝임이 깃든 눈동자는 전폭적인 신뢰로 넘쳐났고 살짝 기울인 목은 아기고양이가 머리를 갖다대는 동작과도 닮아 이 아이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게 만든다.


'선...배...'


잇시키의 모양 좋게 부풀어오른 입술에서 뜨거운 탄식과 같은 음성으로 띄엄띄엄 말하고는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 본다. 가슴 아프다는 듯이 교복의 가슴 부근을 꼭 쥐는 동작이 마치 기도를 하는 것 같았고 가녀리고 보들보들한 손끝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동생과 후배의 '누구 편 들거야?'라는 무언의 질문은 그야말로 압력이었다.


하지만 전방에서 밀려오는 귀여운 압력과는 또 다른 압박을 나는 옆에서도 느끼고 있었다.


힐끗 곁눈질로 살펴보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정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

'.......'


무언은 그만두지? 삿포로의 눈축제에 있는 눈사람도 그렇게 차가운 표정은 안 하겠다.

이건 뭐라고 대답해도 좋은 일이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나는 '느하핫'하고 의미 없는, 그저 정적을 채우기 위해서만 헛웃음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대로 1초가 지났는지, 2초가 지났는지. 혹은 영겁의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정열과 냉정 사이에서 대소멸할 것 같았는데 이윽고 끝의 시간이 찾아왔다.


똑똑


아주 오랜만에 이 방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소리에 핫하고 모두가 제정신을 차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드디어 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틈에 나는 후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하고 성대하게 한숨을 쉬었다. 죽는줄 알았네. 진짜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과연 내 목숨의 구세주는 누구였는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문이 열리는 법은 없었다. 왜 그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문 너머에서 재차 똑, 똑...하고 다소 망설임이 섞인 듯한 노크를 하였다. 그러자 유이가하마가 아차싶어 코마치에게 말을 걸었다.


'코마치 쨩 대답을 해줘야지'


'아, 네! 들어오세요! 열려있어요!'


코마치가 소리높여 말하자 방문객은 머뭇머뭇 문을 열었다.


'시,실례합니다...'


듬직하지 못한 음성으로 말을 하면서 천천히 들어온 것은 푸른기운이 감도는 흑발의 남학생.

카와 뭐시기 양의 남동생, 카와사키 타이시였다.

부실 안을 언뜻 보고는 타이시는 일순 주춤거렸다. 아무래도 여자율의 높음에 당황한 모양이다. 입실하는 것을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으려니 유이가하마가 흔들흔들 손을 흔들면서 친근하게 말을 건다.


'오 타이시 군이다. 오랜만이야'

'어서 들어오렴'

'아 죄송합니다. 감사함다.'


유키노시타가 입실을 재촉하자 타이시는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니 볼을 긁적이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헤헷하고 수줍게 미소지었다.


으음 뭐 귀여운 선배가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주면 그런 대응을 하게되는 건 이해한다.

이해하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뭘 실실거리는 거냐 너는. 누나한테 일러바쳐주마. 그렇게 생각했지만 카와 뭐시기 양한테 말을 거는 허들이 높구만. 어쩔 수 없지. 이번 한번만 봐주마. 내 낮은 커뮤력과 네 누나의 무서움에 감사하라고.


그렇게 나는 봐줬는데, 그걸 봐주지 않는 녀석이 있다.


'누군가요?'


잇시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타이시를 슬쩍 보고는 바로 나에게 시선을 돌려서 수상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카와사키 타이시. 카와사키의 남동생이다.'

'헤에...아니 우선 카와사키가 누군데'


흥미없다는 듯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은 했지만 잇시키는 전혀 촉이 오지 않은 모양이다.


'몇 번인가 만났잖냐...무도회 때도 의상 관련해서 도와주기도 했고'

'아~ 그 왠지 무서워 보이는...'


바로 생각이 미치자 잇시키는 허둥지둥 의자를 움직여 타이시와 거리를 뒀다. 군자는 위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소리로군.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다. 카와 뭐시기 양 동생을 dis하면 진짜로 열받아하니까 말이지!


그렇게 빈 공간에 코마치가 영차영차 파이프 의자를 날랐다.


'일단 앉아 앉아'


탁탁하고 좌면을 두들기며 재촉하고는 코마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고마워 히키가야 양...'


타이시는 황홀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했는데 바로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문뜩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유달리 급발진을 하여 지껄여댔다.


'아, 형님도 있으니까 히키가야 양이라고 부르면 알아듣기 힘들지. 호칭을 조금 바꾸는 편이 낫겠,구나? 그치?'


하지만 코마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람이라고 말하듯 고개를 저었다.


'어? 완전 괜찮아. 여유롭게 알아듣는데? 아무 문제 없어. 지금 이대로 괜찮을 정도. 타이시 군 우리 오빠 형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렇겠죠'


타이시는 무너지듯 의자에 허리를 떨구고는 그 기세 그대로 털썩 어깨를 늘어트려서 최종회의 죠처럼 새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이가하마는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윽...'하고 말문이 막혔고 유키노시타는 '....이름으로 부르기'라고 조그맣게 중얼이며 살짝 시선을 내리 깔았다. 거기에는 어딘지 동정이나 공감의 색이 어려있다.


아니아니 타이시 따위가 코마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아직 이르지. 프리큐어도 8화는 걸렸으니까 말이지. 응 뭐 이런저런 수순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진짜 어느 타이밍에 이름으로 부르는 걸로 이행들 하는 걸까요? 어쩌면 좋겠냐?


등등, 나를 돌아보는 내 한켠에서 잇시키가 코마치 옆에 슥하고 의자를 놓고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콩순아 그거 겉치레 없이 말한거야?'


그 말에 코마치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지만 바로 겁없는 미소를 지으며 썸즈업을 해보였다.


'후훗 물론 내추럴입니다'

'하핫 어느쪽인지 모르겠어'


잇시키의 메마른 웃음에 우리들은 쓴웃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정말로 코마치 쨩은 가끔씩 읽을 수 없는 측면이 있단 말이지요...


'코마치 양, 자세한 얘기를 들어주는 편이'

'아, 그러네요.'


유키노시타의 말을 듣고 코마치는 휙하고 타이시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거창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겐도 포즈로 유난히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흠...그러면 듣도록 하죠.'

'아니 그게 정말 별거 아닌 얘기라고나 할까, 엄청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얘기를 들어줬으면 해서...'


타이시는 겸연쩍음에 꾸물꾸물거리면서 힐끔힐끔 코마치를 살핀 다음에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에 전혀 이야기가 진전이 없다.


코마치는 흐음흐음하고 자못 진지한 척 듣고 있는데 이쪽은 조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얌전히 듣고는 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다리를 떨고 말았다. 잇시키로 말할 것 같으면 전혀 대회에 참여하지 않고 따분하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이따끔 웃는가 싶더니 이녀석 SNS 보고 있잖냐...뭐냐 그 망한 미팅에나 있을 노매너 소개팅녀 무브...


'실은 좀 부활동 선택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든요...뭔가 조언을 해주면 좋겠다 싶어서...어,어떨까...'


냉큼 말하지 못하겠냐...고 오만상을 쓰고 있자니 마침내 타이시의 이야기가 본제에 들어섰다.


'그러냐. 야구부 들어가라, 야구부. 그따위 고민보다 야구를 하자고. 자 결정.'

'즉답했어!? 심지어 무지 대충!!'

'하다못해 고민하는 이유 정도는 들어주렴...'


놀라는 유이가하마와 어이없어 하는 유키노시타. 하지만 나도 대충 말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생각을 하고서 충고한 것이다.

무엇보다 프로 야구 선수가 되면 성우랑 결혼할 수 있다. 라노베 작가보다 훨씬 확률이 높다. 아니 그보다 아예 라노베 작가가 제일 연이 없는 거 아냐. 라디오 구성작가도 성우랑 결혼했구만. 나도 연말에 발표하고 싶다만?


그렇게 내가 드래프트 회의를 향해 프로 지망서를 뇌내에서 제출하고 있자니 딱 한사람 진지하게 듣고 있던 코마치가 흐음하고 신음했다.


'임시 입부는 벌써 했어?'

'아니 임시 입부를 해봐도 잘 모르겠어서...물어봐도 제대로된 답을 해주지 않잖아요. 우리는 느슨하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는거고...'


타이시는 난감하다는 듯이 웃고는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무래도 코마치랑 직접 대화하는 건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이해한다...


'누나가 예비교 다니기 시작할 거라서 케이카를 제가 돌봐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러면 너무 빡센 부활동이 아닌 편이 낫겠죠. 융통성 있는 곳이 편하다고 할까요...'


'....과연'


타이시는 이미 나한테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내가 맞장구를 쳐주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뭐 사춘기 남자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는 여자랑 상급생인 미소녀들 앞에서 긴장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도와달라는 듯이 바라보면 나도 무턱대고 거절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사춘기 남자. 역시 에둘러서라도 어필하고 싶어지는 법이죠!


'역시 저도? 이제 고등학생이잖아요? 집안 사정도 제대로 알아두는 편이 낫다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타이시는 힐끔힐끔 코마치를 봤다. 어떻슴까? 나 이렇게 보여도 제법 생각이 많슴다?라고 말없이 마구 어필하고 있다.

그런 사소하고 아주 눈물나는 어필을 당사자인 코마치는 흠흠하고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는데, 이윽고, 흐음하고 크게 끄덕이고는 몸을 휙하고 내쪽으로 향했다.


'오빠 이거 그거지?'

'그거구나'


서로 수긍하고 눈과 눈이 통하는 ☆MUGOㆍ음.

고개를 갸웃거리는 타이시,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를 내버려두고 남매끼리 멋대로 이해하고 있으려니 그게 의아했는지 드디어 잇시키가 반응했다.


'그게 뭔가요?'

''4월병''

'들어본적 없는 병...'

'너희 집만 가정의 의학이 두꺼울 것 같구나...'


나랑 코마치가 1초도 어긋나지 않게 입맞춰어 말하자 유이가하마는 어이없음이 섞인 쓴웃음을 지었고 유키노시타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잇시키에 이르러서는 '하아 그러신가요'라고 흥미없다는 듯이 말한 직후 또 완전 무시를 하는 지경이다.


딱 한사람 타이시만 헤벌레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설명해줄까...


'4월병이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혹은 사회인이 새로운 환경에 너무 기합을 준 바람에 쓸데없는 짓을 시작하는 병이다.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라는 식의 어중간한 의식개혁이 이루어진 결과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하는 등 아무튼 쓸데없는 짓을 해대지.'


차분히 완벽하게 말해서 들려주자 유이가하마는 으음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곤혹스러워 했다.


'별루 나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4월이니까 시작해볼까 하는 물러터진 생각을 하는 놈들이라고. 그런게 오래 지속될리 없잖냐. 결과 치지 않는 기타나 먹다만 프로테인이 양산되는거지...'


이 4월병이 무서운 점은 지효성 독처럼 나중에라도 서서히 대미지를 주는 점이다. 대청소를 할 때 같은 때 기타나 프로테인 같은 말하자면 꿈의 잔해를 목도할 때마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중간한 꿈의 한조각이 불시에 나를 상처입힌다. 그중에도 일기는 대미지가 크다. 아이...카츠...내 일기는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것이 4월병의 후유증이다.


'묵묵히 조용하게 하면야 딱히 문제 없지만 뭐 보통은 『시작했다 자랑』이라고 할까요 과시하는 방식이 짜증나서 가족 입장에서는 조금 귀찮아요.'


코마치가 무지 진지한 표정으로 엄청난 말을 꺼냈다. 에엑...코마치 쨩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니...조금 쇼크...


'아, 아니...나는, 그런 게, 아닌데요...좀 더, 이렇게, 제대로된 부활동도 해봤구요...그럭저럭이지만요...'


끊어질락 말락하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타이시가 화끈하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음, 뭐 남자는 하나나 두개쯤 그런 기억이 있는 법이지. 미안해? 왠지 치부를 들춰버려서. 속죄의 의미는 아니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줘야겠군.


'중학교 때는 뭘 했었냐?'


방금전 말로 보아 무슨 부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굳이 입에 담았을 정도니까 타이시한테 애착이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짐작을 하고서 물어보자 타이시는 냉큼 고개를 들어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소프트 테니스임다! 현대회까지 진출했어요!'


덤으로 힐끔 코마치를 보고 어떻슴까?라고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 코마치는 오~하고 영혼없는 박수로 답했다. 뭐 타이시가 기운을 차렸다면 됐다. 그간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러냐. 그러면 테니스부는 선택지에서 제외로군'

'네에? 왜임까?!'


타이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활발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의문스럽게 여기는 것은 타이시 뿐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모두가 그럴만도 하다고 수긍했다.


'아 토츠카 선배...'

'토츠카 오빠겠죠...'

'사이쨩이면 어쩔 수 없지...'


잇시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코마치는 절실하게 감동, 유이가하마는 반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아이 참 체념당하고 말았어...그러나 그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나는 타이시 같은 경박한 놈을 그 신성한 테니스 부에 가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지켜주고 싶다, 그 미소...


하지만 단 한사람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끄덕이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

유키노시타는 어깨에 걸린 머리카락을 산뜻하게 쓸어넘긴 다음 승리를 자랑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토츠카 군은 신입부원이 늘면 기뻐할 것 같은데?'

'윽, 그,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군...'


역시 유키노시타다...적확하게 내 약점을 찔러온다...어디 그뿐일까 그러고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네가 신입부원 획득의 찬스를 허사로 돌린 걸 알면, 슬퍼하겠구나...'


짐짓 안쓰럽다는 듯이 말하고 유키노시타는 살짝 시선을 내리 깔았다. 연극조의 호들갑스러운 몸짓이었는데 그래도 유키노시타 정도의 미인은 그림이 되니까 곤란하다.


게다가 유키노시타가 말하는 것은 정론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손쓸 도리가 없다. 뭐 입 정도는 쓰겠지만요.


'그거라면 문제 없다. 틈을 봐서 내가 지금부터 테니스부에 들어가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오고 가고 쌤쌤인 계산이...'


하지만 그 말참견도 끝까지 하게 두지 않았다.


'히키가야 군'


유키노시타는 나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부딪혔다.

은은하게 상기된 뺨. 터질 것 같은 웃음을 띄우고 있는 입가. 모양 좋은 벚꽃색 입술이 살짝 움직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두드러지게, 따뜻하게 꽃이 피고 뽐내듯이 선고했다.


'기각'


그렇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냥 말해 봤을 뿐이라구요. 오히려 기각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했답니다.


'....뭐 토츠카랑 상담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겠군.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다만'


내가 패전의 변을 늘어놓자 타이시는 조용히 거수를 했다. 네, 타이시 군 뭡니까.


'저기 테니스부는 바쁜가요?'

'으음 어떨까나. 연습은 꽤 열심히 하는 느낌. 사이쨩은 점심시간에도 점심연습을 해'

'어어, 엄청 열심히 하지. 내가 놀러가자고 꼬셔도 바쁘다면서 좀처럼 못가거든'


특히 최근에는 임시 입부니 신입생 권유니로 몹시 바쁜 모양인지 쉽사리 놀러 갈 수가 없다. 일만 없다면 나는 토츠카랑 마음껏 놀러갈 수 있는데 말이다...밉다, 일이 미워. 마감이 밉다. 전부 일 때문인 것이다...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일이 잘못한 거야.


그런데 왜 이로하스는 흐음?이란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걸까요?

그런 걸까요, 아닌 것 같은데요라는 반응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했더니 잇시키가 멋대로 뭔가를 납득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뭐 관심없는 사람이 권유했을 때는 대개 그렇게 말하죠~ 나중에 한가해지거든~이라거나 지금은 정신없이 바빠서~라거나 자고 있었어 학교에서 봐~라거나'


'너만 그런 거겠지. 그거...'


뭐냐고 그 마지막의...밤 8시 정도에 읽씹당하고 다음날 아침에 받은 라인이냐고...이쪽은 질문형으로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면피용 스탬프랑 같이 보내서 랠리 종료다 뿐일까 두번 다시 라인 하지 않는 그거잖냐...


그건 확실히 너만 그런 걸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힐끔 둘러보니 전원이 신묘한 표정으로 으음...하고 신음했다.


'어어...다들 말이 없어...'

'다른 용건이 있어, 예정이 있어...라는 표현은 쓰긴해...아니 정말로 예정이 있어서 그렇게 거절하고 있는 거지만...'


유키노시타가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괴롭다는 듯이 말하자 유이가하마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경단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 나는 별루 그런 소리는 안하지만 놀러가자고 꼬셔대면 좋아! 이담에 다같이 가자는 말은, 해...'


'아 그건 무지 많이 쓰죠'


코마치가 웃는 얼굴로 맞아맞아~라며 끄덕끄덕 수긍했는데 나도 타이시도 전혀 웃을 수 없다.


'다음부터 그 말 들으면 진짜 심각하게 낙담하겠네요...'

'차라리 똑부러지게 거절해주는 편이 낫다고'


지금 처음으로 나랑 타이시 사이에 연대감이 생겨났다. 이걸 유대감이라 이름 붙이도록 하자...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의 우정에 전율하고 있으려니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목소리가 날라왔다.


'너도 자주 갈 수 있으면 가마라고 말하지 않니.'

'맞아...그거 어느쪽인지 정말 난처해...'


보니까 유키노시타 뿐만 아니라 유이가하마도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두사람이 합세하자 냉담함은 배가되어 그야말로 얼음이나 물이다 뿐일까 액체질소급이다.


'예정도 없는 주제에 한번 거절하고보니까 더 악질이지'

'응, 그래놓고 어차피 꼭 가구...'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그치?'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금세 위화감을 깨닫고 '...어라?'하고 이번엔 서로 역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이가하마 양, 그건 언제쯤 일을 말하는 거니?'

'언제라구 할까...'


질문을 받은 유이가하마는 시선을 위로 올리고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입을 막더니 양손을 앞으로 뻗어 휙휙 휘저었다.


'아 진짜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냐....에헤헤'


유이가하마는 방금전 한말을 뒤집고 수줍게 웃으며 얼버무리듯 경단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하, 뭘까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아니 그보다 진짜로 뭔데? 어느거? 언제 뭐...

켕기는 일도 없거니와 짚이는 일도, 짐작가는 일도 없다만 살며시 입가를 손가락으로 감추고 눈을 돌리는 유이가하마의 뜨거운 표정이나 혹은 얼음기둥처럼 예민해진 동시에 눈물을 머금은 유키노시타의 시선에 내 위장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해야한다고 나는 내장 깊숙이서 최대한 생각나는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아니야, 뭐가 아닌가는 모르겠다만 아니다. 나는 누가 권유해도 진짜로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고. 그리고 당일이 되어서야 무지 가고 싶어질 때도 있어. 그러니까 갈수있다면 가마라고 대답하는 거다. 즉 당일 아침이 되어서 관측하기 전까지 대답을 알 수 없는 중첩 상태라 할 수 있지. 이건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 부르는 사고실험으로도 확정적으로 명백해'


'슈레? 그게 모야?'


낯선 단어에 후엥?하고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유키노시타는 힝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거 왜 고양이인걸까. 무척 마음이 아파.'

'뭐 고양이는 상자에 들어가는 법이니까요'


코마치가 적당히 위로하는 한켠에서 잇시키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굉장한 방식으로 얼버무리시네요...'

'하하하 무슨 소리냐 하하하'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헛웃음을 치자 잇시키는 으음하고 팔짱을 끼고서 시선을 내리깔고 무슨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지난번의 그것도 비밀이겠네요. 잘 알겠~어요☆'

'하하하하하 무슨 소린지 하하하하하 전혀 모르겠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근데 진짜 무슨 말이냐?'


잇시키는 찡끗☆ 윙크를 하고서 요망하게 경례. 그리고 그 손을 슥하고 내려서 입술 앞에서 집게 손가락을 세웠다. 쉿하고 옅은 탄식을 내뱉고 살짝 가늘게 뜬 눈이 장난스럽게 흔들려서 소악마 같은 미소로 바뀐다.


....큰일인데.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 위험하다. 방금전부터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나를 향해 의혹의 시선을 겨누고 있다. 아주 안좋아. 심지어 타이시조차 '이자식 뭐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남자의 우정은 덧없구나...


내가 절망에 휩싸여 있자니 맞은 편에서는 코마치가 에휴하고 어이없다는 한숨을 쉰다. 그리고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잇시키 쪽에 얼굴을 향했다.


'테니스부 사정은 잘 알았는데 축구부는 어떤가요? 바쁜가요?'


나이스 어시스트다 코마치! 나도 탈 수밖에 없다, 이 빅웨이브에! 나도 코마치를 본받아 잇시키를 쳐다보자 잇시키는 심사숙고해가면서 입을 열었다.


'연습량은 별로 안 되지만 상하관계 같은 거나 선배와의 소통 문제로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의외네. 그런 거 없을 것 같았는데...'


유이가하마는 흐헤~하고 입을 벌리며 놀랐지만 나는 전혀 의외인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나는 알겠다. 그거지? 하야마가 타이시는 말이지, 그런 방식으로 만족해?라는 소리를 상냥한 척 말하는 거지? 그녀석 정답은 말하지 않는 주제에 뭔가 좀 멋진 소리를 했다는 투로 위에서 내려보듯 말하잖냐. 그건 확실히 큰일이지...'


'편견이 엄청나!'


'아냐, 경험이다'


유이가하마의 비난에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실제로 그걸 맛보면 편견이란 말은 못할 거다...절절하게 떠올리고 있자니 유키노시타가 불쑥 중얼거렸다.


'...언니랑 똑같은 논법이구나'


맞아맞아. 진짜 그거. 내가 말없이 끄덕이자 그걸 본 잇시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야마 선배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하야마 선배 얘기가 아니에요. 토베 선배라구요.'

'토벳치인가...토벳치는 응, 뭐, 응...'


유이가하마는 짐작가는 구석이 있는지 슬쩍 눈을 돌리고 말을 흐렸다. 다정하구나...


'그 사람 선배티를 내는데 안달나 있거든요...후배가 생기는 게 기쁜지 유난히 형님행세를 하려든다고 할까요 우쭐거림의 절정에 올라서 마운팅을 해온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로하스는 왜 다 말해버리는 걸까요? 그것도 꽤나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니?


'아! 거들먹 마운틴인 거군요.'


코마치가 흐음흐음하고 사정을 잘 안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면서 적당한 소리를 했다. 뭐냐 그거 데스티니 랜드의 새로운 어트랙션? 너무 무섭잖냐...보라고 타이시도 쫄아서 쓴웃음 짓고 있고...


'저, 그런 건 좀...'


현대의 아이놈...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그런 건 좀...이라 말하는 타입이라서 너무 호되게는 말 못한다.


'운동부는 어디나 비슷한 상황이겠구나. 체육회계열은 아무래도 상하관계나 종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그렇다면 문화부일까?'


유키노시타가 아래턱에 손을 대고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에 잇시키가 훗하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문화부 쪽이 그런 건 뿌리깊지만요. 남녀로 나뉘지 않는 곳도 많아서 더 다투기도 하구'

'뭐냐 그거 경험담? 무슨 부 얘기냐?'


묘하게 실감이 담긴 음성이 유난히도 섬뜩해서 무심코 물어보고 말았다. 하지만 잇시키는 방실방실 웃을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으으...무지 궁금하다...혹시 내가 알고 있는 부활동일까...


내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으려니 똑같이 생각에 잠겨 있던 타이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문화부인가...저,저기, 히,히키가야 양은 봉사부에 가입한거야?'

'응. 그보다 코마치 부장인 걸'

'그렇구나. 헤에...아, 그러면...'


타이시가 뭔가를 말하려 들었다. 그 말의 다음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차단했다.


'뭐 아직 당황할 시간이 아냐. 조금만 더 고민해볼까.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자. 잠시 꽃을 따러 갔다오마'

'어...'


모두가 당혹스러워 하는 가운데 나는 냉큼 의자에서 일어나 어깨를 돌리면서 겸으로 타이시에게 다가가 턱짓으로 복도를 카리켰다. 그 의도는 올바르게 전해졌는지 타이시도 허둥지둥 일어섰다.


'그, 그러면 저도 오늘은 이걸로...'

'아, 응, 또 봐!'


코마치의 작별 인사를 등으로 받아들이며 나랑 타이시는 부실을 뒤로 했다. 뭐 신경 쓰이는 여자애 앞에서 내 설교나 다름없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을테고 그정도 배려는 해주마.


복도를 한동안 걸어 목소리가 부실에 닿지 않는 곳까지 온 다음에 나는 타이시를 돌아봤다.


'너 진심으로 이 동아리에 들어올 생각이냐?'

'....그게 가능하면 좋겠다고는, 생각함다....역시 형님 입장에서는 안될까요?'


타이시가 긁적긁적 머리를 긁적이더니 겸연쩍다는 듯이 헤헷하고 미소를 지었다.

뭐 확실히 코마치한테 접근하는 남자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지는 않다. 코마치를 노리고 봉사부에 들어오려 들다니 용서못할 소행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말하도록 하자.


'...이건 코마치 문제는 빼놓고 오빠로서의 경험을 통해 생각하는 말이다만'


그렇게 서론을 깔자 실실 웃고 있던 타이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래서 시스콘은 신용할 수 있다. 틀림없이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 줄 것이다.


'...남동생이 그런 배려를 해주는 것도 너희 누나는 싫어하지 않겠냐'

'하핫 진짜로 누나가 싫어할 것 같네요'


타이시는 명랑하게 웃었다. 거기에는 부끄러움은 없었고 대신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배려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은을 하고 싶은 것 뿐이거든요...그리고 누나도 이 부활동이면 반겨 줄 것 같거든요.'


'하? 왜'


유난히 산뜻한 표정으로 말하는 타이시를 향해 나는 있는힘껏 의아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타이시는 생끗하고 불쾌한 느낌으로 웃더니 농담이 지나치다고 팔꿈치로 찔러댔다. 짜증나네 이녀석...


'아이참, 꼭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형님'

'형님이라고 부르지마 죽여버린다 진심 냉큼 돌아가 또 연락하마'


타이시를 대접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나는 혀를 차고 쉿쉿하고 타이시를 손으로 내쫓고 등을 돌렸다. 화장실을 향해 거침없이 걷기 시작한 나를 향해서 타이시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상쾌한 인사를 등으로 받으며 나는 한쪽 손을 들어올려 쉿쉿하고 손을 흔들었다.


정말이지 이래서 시스콘은 처리하기 난감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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