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배달부 키키의 성공배경 애니



스튜디오 지브리 제작 네번째 작품인 <마녀배달부 키키>는 역풍 속에서 출발했다. 1984년의 <바람계곡 나우시카> 개봉 이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의 흥행성적이 신통치 못했고 영화업계에서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작품에 대한 시선은 싸늘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 <마녀배달부 키키>는 대히트를 치게 되고 프리랜서였던 애니메이터의 사원화도 가능해졌다. 미야자키 감독의 오른팔이었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 씨가 말하는 제작비화.

타카하타 씨가 거절해서 미야 씨한테 가져간 <마녀배달부 키키>

<마녀배달부 키키>는 스튜디오 지브리로서는 처음인 외부에서 가져온 기획으로 출발했습니다. 광고대리점에서 제의가 들어온 것은 1987년 봄, 마침 <이웃집 토토로> <반딧불이의 묘>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렵이었습니다. 버블 경기와 함께 일본영화도 활기가 생기던 시기입니다. 영화제작에 기업이 타이업을 하는 것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 <마녀배달부 키키>는 그 최초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작에 배달부(宅急便)란 말이 붙어 있다는 이유에서 광고대리점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알기쉬운 기획은 없었던 거겠죠.

실은 이 기획 처음에는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작으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타카하타 씨가 거절해서 미야 씨한테 '이런 기획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래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난 읽을 여유가 없으니까 스즈키 씨가 읽어'라고 말했죠. 그럴 때는 미야 씨라는 사람은 어김없이 다음날 아침에 감상을 물어봅니다. 그래서 업무가 끝난 야심한 밤에 단숨에 읽었습니다. 물론 아동문학으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떤 접근법으로 영화를 만들면 좋을까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갑자기 복잡해집니다.

시골에서 도회지로 나와 일하는 여성들을 그린 책

고민하면서 그 날은 잤는데 이튿날 아침 아니나다를까 미야 씨가 '어땠어?'라고 물어봤습니다. 나도 그 무렵에는 꽤나 미야 씨한테 단련돼 있었던 거겠죠. 그럴 때면 반사적으로 말이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원작 겉보기에는 아동문학이지만 아마 읽는 사람은 젊은 여성이 아닐까요'

'왜?'

'아마 시골에서 도회지로 나와 일하는 여성들을 그린 책이거든요. 그녀들은 좋아하는 걸 사고, 좋아하는 곳에 여행을 가고, 자유롭게 연애도 즐깁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 돌아온 순간 문뜩 찾아오는 외로움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영화가 되겠어요.'

라고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대로 말했어요(웃음) 그러자 미야 씨가 '재밌네'라고 별안간 흥미를 보였습니다. 제가 말해놓고도 정말 그런 테마로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지 끝까지 고민하게 됩니다만...

당신이 한 소리는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잖아!

그렇다고는 하나 미야 씨는 토토로를 한창 제작하는 도중. 나는 작업을 할 수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언제까지고 우리같은 늙은이가 영화를 만들수도 없는 노릇이다. 젊은이한테 기회를 주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프로듀서 겸 각본가를 맡고 감독은 미야 씨 밑에서 연출을 배우던 카타부치 스나오 군을 발탁하게 됐습니다.

토토로의 제작이 끝나자 미야 씨는 곧장 각본집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원작을 읽고 처음으로 한 말은 '스즈키 씨가 한 소리는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잖아!'였습니다. 아니,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지만...이라고 말을 하다보니 결국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에 전부 함께 하게 됐습니다.

미야 씨의 사무소가 있었던 아사가야에 각본이 완성될 때까지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었죠. 뭔가 물어볼 것이 있거나 의견을 나눌 때마다 바로 대답할 수 있게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옆에 있었습니다. 미야 씨의 집필은 상당히 특이한데 나한테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연필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1시퀀스를 끝낼 때마다 바로 원고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때?'라고 물어보기 때문에 '여기는 좀더 이렇지 않을까요'라고 감상을 말하면 바로 고칩니다. 그런 식으로 쓰는 작가는 달리 없겠죠. 보통은 혼자서 서재에 틀어박혀 집중하는 법이잖아요.

집필 스타일도 그렇지만 신을 구성하는 수완에도 감탄했습니다. 이야기의 서두 13살이 된 마녀는 독립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키키가 고향을 떠나게 되는데 원작은 상당한 볼륨을 할애하고 있어요. 범용한 인간이 만든다면 20분 정도는 걸릴 것 같은 그 장면을 불과 5분 남짓으로 정리해버렸습니다. 기본설정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알기 쉽게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원고를 읽은 순간 무심코 '미야 씨, 이건 굉장하군요'라고 말한 걸 기억합니다.

세계는 남자랑 여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이걸로 됐어

그리고 키키가 코리코의 마을에 도착하자 느닷없이 톰보라는 소년을 만나죠. 남녀가 바로 만나는 게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보통은 우선 동성 친구를 사귀고 안정을 얻은 다음에 이성에 눈길이 가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더니 '세계는 남자랑 여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이걸로 됐어'라고 말했습니다. 미야 씨답죠.

반대로 그다음에 얼마간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에 숲속에서 우르술라라는 이름의 소녀와 만나지 않습니까? 그녀의 설정을 미야 씨는 27살로 했는데, 나는 같은 연령대가 낫다고 생각해서 엄청 논쟁을 했죠. 그 결과 절충해서 18세로 정하게 됐습니다(웃음)

우르술라에 대해서 감회가 깊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녀가 극중에서 그리던 그림입니다. 실은 그 그림 미야 씨의 장인이 가르치던 양호학급의 학생 작품이 바탕입니다. 전쟁중에 반전활동으로 투옥당한 경험도 있는 기골 있는 분으로 그후 오랜세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사회복귀에 진력하셨다고 합니다. 그 인연으로 그림을 쓰게 됐는데 그런 인상적인 소도구의 구사방식이 미야 씨는 참으로 능숙합니다.

키키와 톰보의 장면 '그런 건 못써!'라고 기브업

키키와 톰보의 관계로 말하자면 이야기 중반에 톰보가 키키를 파티에 초대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부인이 만든 청어 파이를 배달하는 사이에 약속시간이 지났고 갑자기 비도 내려서 키키는 감기에 걸려 드러눕게 됩니다. 그 후에 재회를 했을 때 두사람의 거리는 단숨에 줄어듭니다만, 나는 그전에 미소가 지어지는 치정싸움 같은 장면을 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걸 거쳐서 두사람은 보다 사이가 좋아진다는 표현이 낫지 않겠냐고 생각한 거죠.

미야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수정해보기는 했는데 '그런 건 못써!'라며 기브업했습니다. 미야 씨는 주관적인 사람이라서 남녀관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특기가 아닌 거죠. 그런 사람한테 굳이 요구를 하면 어떻게 될까?하는 장난기로 살짝 있었습니다만(웃음)

그렇게 시나리오는 완성되어 갔고 문제의 라스트신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르술라의 오두막집에서 돌아온 키키는 청어 파이를 배달한 노부인에게 뜻하지 못한 선물을 받고 눈물 짓습니다. 당초 미야 씨는 거기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아주 웰메이드한 좋은 이야기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오락영화니까 마지막에는 관객들에게 서비스로 화려한 장면이 필요하다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행선에서 톰보를 구하는 스펙타클한 장면을 추가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작화에 들어선 단계에서 그 장면은 스탭들 사이에서 새삼 문제가 됩니다만...

원작자인 카도노 에이코 씨가 어떤 영화가 될지 걱정하고 있다고 해서...

각본이 완성된 다음에 원작자인 카도노 에이코 씨가 자기 작품이 어떤 영화가 될지 걱정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그 말을 미야 씨한테 했더니 '스즈키 씨 둘이서 만나러 가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럴 때면 미야 씨의 행동은 무척 빠릅니다.

카도노 씨 자택에 찾아가서 '한번 지브리에 놀러 오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키치죠지에 있는 스튜디오까지 함께하게 됐습니다. 그 여로는 평범하게 가면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걸 느긋하게 한시간 정도 들여 달렸고 미야 씨는 카도노 씨에게 무사시노의 풍경을 보여주며 돌아다녔습니다. 미야 씨는 그 부근의 길을 전부 꿰고 있었는데 어디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 전부 머리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에는 카도노 씨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다 있었군요!'라며 기뻐하셨고 지브리에 도착한 무렵에는 이미 마음의 거리가 다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사람은 계산이 아니라 본능으로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실은 나도 나중에 비슷한 일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작가인 프레더릭 백 씨를 지브리 미술관에서 스튜디오까지 안내했을 때, 다양한 나무를 보여주며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백 씨도 '토쿄에도 이렇게 근사한 장소가 있었나요!'라며 기뻐하셨습니다.

미야 씨가 각본 집필에 힘쓰는 한편으로 연출의 카타부치 군이나 캐릭터 디자인 및 작화감독의 콘도 카츠야 군 같은 주요 스탭은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고틀란드 섬에 로케헌을 갔습니다. 그곳은 예전에 미야 씨가 린드그렌을 만나기 위해 찾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미야 씨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해외여행. 동행했던 사람 말에 의하면 미야 씨는 긴장한 나머지 오른손, 오른발이 같이 움직이는, 소위 난바 걸음(ナンバ歩き)이었다고 합니다.(웃음) 그런 상태로 보았기에 한층 더 깊은 인상이 남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접하는 유럽의 아름다운 경치를 젊은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죠.

이 체제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불안해진 두사람

스탭이 로케헌을 하고 귀국했고 각본도 완성. 드디어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하려 했을 때 토쿠마 쇼텐의 상층부에 기획의 설명과 감독 소개를 하게 됐습니다. 그 모임을 마치고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이 체제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런지 불안해졌습니다. 토쿠마 쇼텐을 나와 모두와 헤어진 다음 나는 미야 씨에게 카페를 들리자고 말했습니다.

'이대로 잘 풀릴까요?'

솔직하게 물어보자 미야 씨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어떻게 할까 스즈키 씨'라고 말했습니다.

'토토로에 이어 연투를 하게 되어 송구스럽지만 역시 미야 씨가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부탁드리자 미야 씨는 그 자리에서 '알겠어'라고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며칠후 스탭을 모아서 그 얘기를 했고 카타부치 군은 계속해서 연출 보좌로 일을 계속하게 됐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인간으로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지만

내가 보는 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사람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인간으로서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지브리는 녹음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외부의 스튜디오에 가야만 했는데, 그럴 때 미야 씨를 차에 태우고 운전하는 사람은 아주 큰 곤욕을 치루게 됩니다. 어느 루트로 갈 것인지, 어느 타이밍에 방향지시기를 켜고,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지,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에 걸쳐 세세하게 참견을 하거든요.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노이로제에 걸립니다. 그 결과 언젠가부터 미야 씨를 태우고 운전하는 것은 내 담당이 됐습니다.(쓴웃음)

그 성격은 당연히 그림을 그릴 때도 나오기 때문에 미야 씨가 얼굴을 내밀면 다들 마음 놓고 작업을 하질 못해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탭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해 키워나가는 것보다도 '미야자키 자신의 분신'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측면도 있는데 그 부분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만...

3시간 정도 산보를 하고 '뭘 하면 좋을까?'라고

감독교대가 정해진 다음 미야 씨는 웬일로 '스즈키 씨 산보를 가자'고 말을 꺼냈습니다. 3시간 정도 거의 아무 말 없이 키치죠지의 거리나 이노카시라 공원을 걸어다녔을까요? 그다음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자 '뭘 하면 좋을까?'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럴 때는 역시 즉석에서 구체적인 답을 해야만 합니다.

'사춘기 아닐까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미야 씨는 지금까지 코난, 나우시카, 라퓨타 이렇게 소년소녀는 그렸지만 사춘기는 다루지 않았죠'

'사춘기라...' 미야 씨는 신음했습니다.

'아직 그 무엇도 되지 않은 유예기간이란 말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갑자기 미야 씨는 '알겠어'라고 말하고 냅킨에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키키의 머리에는 아주 커다란 리본이 달려 있었습니다. 나는 둔감해서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리본은 아직 스스로를 지켜줄만한 확실한 것을 지니지 못한 사춘기의 상징이었던 거겠죠.=

'13세 소녀는 어떤 느낌일까?'

미야 씨의 질문에 마침 그 무렵 우리집 딸아이가 13살이기도 해서 이것저것 구체적인 얘기를 잔뜩 했습니다.

사춘기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지지의 역할도 아주 확실해졌습니다. 그건 단순한 펫이 아니라 또 하나의 나 자신입니다. 마지막에 지지와 대화할 수 없게 된 것은 분신이 이제 필요 없어졌다, 코리코 마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답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스트신을 어떻게 해야할지로 논의

그림콘티와 작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라스트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논의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스탭 사이에서는 키키가 노부인한테 케이크를 선물로 받는 장면에서 끝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다수파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야 씨 없을 때 메인 스탭을 모아 설득을 했습니다.

'감독이 미야 씨가 아니라면 나도 비행선 장면은 없는 편이 낫다고 본다. 하지만 미야 씨가 감독하면 반드시 재밌는 장면이 될 것이다. 차분하게 끝나는 영화도 괜찮지만 오락영화는 역시 마지막에 영화를 봤다는 만족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라스트에 화려한 장면이 있는 편이 낫다'

그런 말을 하는 사이 지금까지 반대했던 스탭도 납득을 해주었습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다음에 키네마슌보의 영화평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좋은 영화였지만 케이크 장면에서 끝났다면 훨씬 더 명작이 됐을 것이다.

나도 아직 어렸기 때문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관객의 마음을 모르는구만'이라고 반발했지만 속으로는 '이걸 쓴 사람은 굉장하군'이라고 감탄했습니다.

확실히 웰메이드한 스토리 구성이라는 의미에서는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영화란 한 씬마다 몰입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의 만족도라는 관점에서는 이걸로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야마도 운송의 사원교육을 위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기업과 본격적인 타이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로 인해서 프로듀서로서의 내 작업도 이 작품부터 크게 달라지게 됐습니다. 제작을 시작하기 전 회합으로 야마토 운송의 사장님 이하 간부진이 지브리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미야 씨는 입을 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야마토 운송의 사원교육을 위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 관객을 위한 영화로 만들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점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역시 굉장한 감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는 그전까지 타이업이라는 발상이 그다지 없었다

야마토 운송의 사장님도 그걸 수용하는 도량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희극배우인 에노켄의 조카에 해당하는 분인 모양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잘 이해하는 분이라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시작은 좋았지만 그 후는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의 나는 아직 타이업이란 것에 대한 인식이 어설펐던 거겠죠.

TV는 애초에 광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타이업을 전제로 만들어집니다. 그에 비해 영화는 그전까지 타이업이라는 발상은 그다지 유입되지 않았습니다. 이 마녀배달부 키키 무렵부터 드디어 상업주의가 시작됐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선전의 방향성입니다. 영화의 세계에는 옛날부터 쇼치쿠, 토호, 오오에이, 토에이, 닛카츠라는 대기업 5사가 있었고 제작/배급/선전을 관리했습니다.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다시 극장에 발걸음을 옮기죠. 그게 선전으로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에는 이미 영화를 습관적으로 보러 가는 사람은 많이 줄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작품을 알리는 것이 힘들어진 겁니다. 거기서 등장한 것이 기업과의 타이업을 이용한 선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야마토 운송의 TV CM등의 힘을 빌려서 마녀배달부 키키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광고대리점과 교섭을 시작하자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나 이쪽의 인식부족으로 상당히 다투게 됐습니다. 결국 대리점과는 정식 계약을 성립시키지 못한채로 작업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영화회사 담당자가 '미야자키 씨도 슬슬 끝물이지'

야마토 운송과의 타이업을 하면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토에이 입장에서는 야마토 운송의 전국 영업소를 이용해서 수만장 단위의 예매권을 판매하고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판매할 수 없게 되면서 '무엇을 위한 타이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나는 토에이의 담당자인 하라다 씨에게 꾸지람을 듣는 처지가 됐습니다. 저와 친한 분이었는데 그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야자키 씨도 슬슬 끝물이지'

나는 깜짝 놀라서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라고 물어봤는데 '아니 그야 흥행성적이 계속 하락하고 있잖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화는 났지만 하라다 씨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영화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흥행성적도 중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좌우지간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이 일을 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라다 씨의 한마디로 처음으로 영화의 성공에는 두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엄격한 말에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친밀한 사람이 엄격한 말로 찔러대자 나는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바로 일본TV로 향했습니다. 관객동원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튼 선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전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아무튼 TV가 뭔가를 해주면 선전은 되겠지 하는 소박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우시카 이후 지브리 영화의 TV방영으로 신세를 진 영화부의 요코야마 소우키 씨를 만나 상의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일본TV도 출자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것이 결정됐습니다. 이걸로 선전도 대대적으로 해주겠구나 안심한 것도 잠시 요코야마 씨의 부하인 오쿠다 세이지 씨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스즈키 씨 지브리에는 다양한 굿즈가 있지요? 그걸 대량으로 가져와주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 게 필요한 걸까?라고 의문스럽게 물어보자 '출자가 정해졌다고 해서 그걸로 바로 일본TV의 전원이 협력해주는 게 아닙니다'라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요컨대 각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디렉터에게 굿즈를 건네면서 접대를 해야만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쿠다 씨와 함께 굿즈를 가지고 일본 TV의 방송국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구나, 이런 일을 해야 하는구나, 선전은 아주 힘든 일이구나라고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마녀배달부 놀이를 하다

그런 덕분인지 일본TV에서 마녀배달부 키키의 특별방송을 방영하게 됐습니다. 이건 엄청난 선전이 될 것 같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프로그램의 분량이 30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심지어 오쿠다 씨 말로는 '실은 예산도 없습니다'라고.

'네 그럼 어떡해요?'
'스즈키 씨 따님과 그 친구가 출연해서 마녀배달부 놀이를 하는 건 어떨까요?'
'그게 방송이 되겠어요...?'

그렇게 'TV에 나올 수 있어'라고 딸을 설득해서 딸의 친구의 협력도 얻게 됐습니다. 마녀배달부 놀이와 13살 소녀들의 생각과 여기에 본편 영상의 일부와 제작현장의 모습을 합쳐서 간신히 특별방송을 완성시켰지만 개인적으로는 선전 업무의 세례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쓴웃음)

야마토 운송과의 타이업으로 생겨난 커다란 효과

예매권은 팔 수 없었지만 선전 면에서 야마토 운송과의 타이업은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각 영업소에 포스터를 붙일 수 있었고, 심지어 마녀배달부 키키의 영상을 쓴 TV광고도 온에어하게 된 것입니다.

CM제작도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밍의 '따스함에 감싸인다면'을 깐 예고편 영상이 15초간 흐르고 원작 카도노 에이코/후쿠인칸 쇼텐이라는 텔롭이 삽입되어 있는데요 이점이 영화와 도서 더블 스폰서, 한술 더 떠서 노래도 들어가 있으니 트리플에 해당되는 것 아니냐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각 방송국의 심사 부문과 교섭을 하게 됐습니다. 원작까지는 괜찮지만 노래는 안 된다거나, 그 반대거나, 방송국마다 결론이 달라서 CM도 거기에 맞춰 다양한 버전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영화와 기업의 타이업이라고 한들 당시에는 이렇게 되는대로 했지 결코 잘 갖춰진 시스템이냐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부 주먹구구로 하는 상태였습니다.

저부터가 당시에는 그런 사정에 어둡기도 해서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만드는 것에 전념하고 싶은데 왜 이런 일을 해야하는거지?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작 프로듀서에서 선전 프로듀서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고 다양한 문제에 머리를 부딪히는 가운데 수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인간 다음부터는 더 잘 생각해서 잘하자는 마음도 들기 ㅁ 마련이거든요.

하라다 씨의 한마디에 분발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난생 처음으로 '대박을 쳐야 한다'는 마음을 먹은 작품이 마녀배달부 키키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어떤 면에서는 내 인생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일단 여기를 닫자는 말을 꺼낸 미야 씨

덕분에 영화는 대히트를 했지만 그런 한편으로 커다란 과제도 떠안게 됐습니다. 한창 제작을 하던 도중 미야 씨가 '일단 여기를 닫자'고 말을 꺼낸 것입니다.

미야 씨는 지브리 설립 당초부터 '하나의 스튜디오로 영화를 만드는 건 세편까지. 세편이나 만들면 인간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녀배달부 키키는 벌써 다섯번째 작품.

하지만 나는 타이업을 비롯해 새로 익힌 일들을 살려서 더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미야 씨를 설득했는데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할건데?'라고 말했습니다.

현실이라 함은 직설적으로 말해서 돈문제입니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제작비는 4억엔 들었습니다. 1억엔도 들지않는 영화가 많았던 시대, 이건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만한 제작비를 마련해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추구하는 퀄리티로 일을 하면 성과급을 받는 애니메이터 한명당 보수는 대체로 한달에 10만엔. 1년동안 전신전력으로 일에 몰두해도 120만엔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당시 기준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직업의 절반 수준이라서 미야 씨는 무척이나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지브리는 스탭의 정직원화와 소득배증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만 총 제작비의 90% 이상이 인건비라서 단순하게 따져서 4억엔의 제작비가 8억엔이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걸 대체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까?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우리들은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덧글

  • 콩키스타도르 2020/03/30 16:48 # 답글

    소득배증계획!!! 아니, 50년대 총리도 아고 뭐냐고ㅋㅋㅋ
  • 감자 2020/04/02 04:19 # 삭제 답글

    "스탭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해 키워나가는 것보다도 '미야자키 자신의 분신'입니다."

    예전에도 이 블로그에서 시로바코 관련글을 보며 저런 말을 접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야자키의 콘티를 예시로 들며 창작자의 창작욕구를 막고 후임 양성을 저해했다.. 그런 식의 글을 본 겉 같은데요,

    그래도 그건 기억으로 비전문가의 말이라 이런 시선도 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스즈키 프로듀서까지 이런 말을 하는 거보니 정말이었나보군요. 신기하네요 참 ㅎㅎ
    제법 긴 글인데도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봐버렸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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