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는 특집 1회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편


'위안부'는 없었다고 말하는 부정파의 주장을 자료 검증과 위안부 피해자 인터뷰를 하는 역사학자, 정치학자가 반론하여, 문제의 쟁점을 부상시킨 영화 <주전장> 4월부터 상영중인 토쿄/시부야의 영화관 이미지 포럼은 여전이 종영일 미정의 롱런이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에서는 언터쳐블한 존재로 자리잡아 가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현재 개최중인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 내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 전시됐던 소녀상에 대해서 비판이 쇄도, 협박이나 테러를 예고하는 팩스와 전화가 끊이지 않은 까닭에 전시를 개시한지 겨우 3일만에 해당 기획전 자체가 중지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표현의 자유의 제한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는 움직임이 표출된 점도 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사카 시의 마츠이 이치로 시장은 8월 5일 기자단을 향해 '위안부 문제는 완전한 날조'라고 말했다.

역사학 업계에서 사실로 여겨지는 위안부 문제.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정치가의 발언이나, 외무성 등의 대응은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학교 교육에 있어서 교과서에서 위안부 세글자가 사라지고, 어디에 불씨가 있는지, 무엇이 국제적으로 비난 받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한국과의 알력에 이목이 집중된 까닭에 문제가 조선인 위안부로 한정되어 놓치게 되는 사실도 있다. 그래서 이번 특집을 통해서 다시한번 위안부 문제의 전체상을 다루고자 한다.

1회는 오랜 세월 위안부 문제를 연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 등의 저서를 지닌 하야시 히로후미 칸토가쿠인(関東学院) 대학 교수에게 위안부의 실태나 문제의 본질에 관해서 해설을 부탁드렸다.

Q.기본적인 내용입니다만 연구자가 '소위 위안부'라는 표현을 쓰거나 「위안부」라고 갈고리 괄호 표기를 하는 점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林博史氏(以下、林氏)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군전용으로 여성들을 모아서 병사의 섹스 상대를 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메이지 이후 일본에서는 구각가 성매매를 공인・관리하는 공창제가 시행되었고, 그런 경우에는 창기 등의 표현을 썼습니다. 일본군도 처음에는 똑같은 표현을 썼지만 차츰 병사를 「위안」하는 여성이라 하여, 「위안부」를 쓰기 시작했죠. 연구자도 일본군이 사용한 역사용어로서의 「위안부」를 사용합니다만, 이 단어에는 실태가 전혀 담겨있지 않죠. 그녀들은 「위안부」가 아니라 성폭력의 피해자・성노예입니다. 그렇기에 갈고리 괄호를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Q.근년에는 한국정부나 지원단체의 대응을 언론이 다루는 경우가 많아서 위안부=조선인(현재의 북조선도 포함)이란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인도네시아 재주 네덜란드인, 동남아시아 쪽도 일본군의 「위안부」였습니다. 그리고 위안부가 된 경위나 피해실태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물론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은 다르기 마련이지만, 「위안부」 문제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국적 별 경향을 말씀해주십시오.

林氏 우선 일본군이 일본 국내에 있을 경우에는 각 주둔지 근처에 매춘업소가 있었고 병사들은 평소 거길 드나들었습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각각의 부대가 중국에 진출하게 되자, 다니던 매춘업소에 '여성들을 데리고 같이 와달라'고 부탁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인 여성이 동원되었습니다.

다만 평소부터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은 성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병사한테 옮기는 케이스도 많았어요. 그래서 성병이 없는, 젊고 매춘에 종사하지 않는 여성을 모으자는 발상을 떠올린 거죠. 하지만 일본 국내에서 여성을 모으면 엄청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조선반도나 대만 같은 식민지에서 연행을 하게 됐습니다. 양쪽 다 식민지가 된 다음에는 일본의 공창제도가 도입되어, 업자가 젊은 여성을 빚을 지게 만들고 매춘에 종사시키는 구조가 완성되어 있었으니까요. 일본군이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업자를 부려 여성을 모으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과 대만인의 경우 인신매매가 많습니다.

Q.빚을 지게 만드는 패턴이라 하시면?

林氏 부모한테 몇 백엔, 현재로 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엔에 해당하는 돈을 건네고 딸을 삽니다. 예를 들어 그 아가씨를 위안소가 있는 중국으로 연행할 경우, 꽤 괜찮은 옷을 사는 비용이나 교통비가 들죠. 그같은 비용과 업자한테 주는 수수료를 얹은 금액으로 위안소의 경영자한테 팝니다. 그렇게 되면 '너는 내가 몇 백엔에 샀다'는 말을 하고 변제를 위해 일을 시키는 겁니다.

부모한테 돈을 건네지 않고, 당사자를 속여서 연행하는 패턴도 있습니다. 가난한 집의 아가씨를 '식사 준비나 재봉 같은 일본군 병사 일상생활을 거드는 일이 있다. 식사도 세끼 제공된다'고 속여서 연행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교통비 같은 게 들기 때문에 결국 빚을 지게 됩니다. 말이 사기지 사실은 인신매매인 케이스가 많죠.

부정파는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말합니다만, 조선반도에서 위안소가 있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연행할 때, 팔을 묶거나 재갈을 물리고 데려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동하는데만 몇 주, 몇 달은 걸리니까요. 빚을 지우거나, 혼자서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속여서 데려갈 수밖에 없죠.

Q.중국이나 동남 아시아 등 점령지의 여성은 어땠나요?

林氏 도시에는 매춘업이 있기에 현지의 방식을 써서 여성을 모으는 것도 가능했지만, 농촌에는 매춘업소가 없기에 일본군이 직접 여성을 모으게 됐습니다. 중국이나 동남 아시아에 많은 유형은 군이 주둔한 마을의 촌장한테 '여성을 준비해라'라고 협박하는 겁니다. 거부하면 자기 목숨이 위험하니까, 그들은 어떻게든 여자를 마련해줍니다. 대체로 '마을 위해서' 모인 그 지역 여성이나, 인근 마을의 여성이죠. 또 중국은 농촌에 항일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게릴라 토벌 활동으로 남자는 죽이고, 여성은 납치해서 연행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트럭에 매달아 연행하는 폭력적인 연행도 있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대로 일본인 위안부 중에는 원래부터 매춘에 종사한 여성도 많았다고 여겨집니다만, 군인의 회상록이나 수기에는 '여성이 『나는 속았다』고 말했다'는 서술이 잔뜩 있습니다. 그러니 일본인 여성도 업자한테 속아서 끌려온 케이스가 많이 있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시 수치로 따지면 식민지・점령지 여성이 많았죠. 그래서 위안부를 비롯한 일본군의 성폭력을 생각할 때는 조선인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인을 포함해서 고려해야 합니다.

Q.말씀대로 위안부를 한국과의 문제로 보면 일본인 위안부의 전신인 공창제도 문제, 성노동자의 인권문제 등 다양한 시사점을 놓치게 됩니다.

林氏 위안부 제도란 일본군이 성폭력의 방법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운영한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현재는 일본과 한국 국가간의 불씨가 되었지만 원점으로 돌아가 '여성의 인권을 짓밟은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Q.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한 점이 국제적으로도 문제시되는 부분이죠.

林氏 일본군의 경우 육군, 해군의 중앙부가 프로세스를 만든 다음에, 현지에서는 물자의 보급 등을 관리하는 후방지원 부서가 위안소 설치와 운영을 담당했습니다. 후방지원 담당이니까 최전선이 아니라, 군의 지배가 안정적인 도심부에 위안소를 만들죠. 그러면 전선에 있는 병사는 '도심부에 있는 병사는 전투도 안 하고 위안소에서 놀고 있다'고 불만을 품고, 전쟁터에서 여성을 납치해서 집단으로 강간, 감금하여 위안소나 다름없는 시설을 만들어 버립니다. 요컨대 군대가 위안소를 설치했기에 성폭력을 더욱 촉진시키죠. 그점이 문제입니다.

Q.그런 점을 감안하면 부정파의 '위안소에 있는 위안부는 고수입의 매춘부였다'는 주장은 조선인 위안부만 가리키는 것이고, 중국 농촌에서 강간당한 사람들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林氏 부정파는 그런 사람들을 위안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성을 강간한 병사는 있었지만, 그건 병사 개인의 행동이고, 일본군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죠. 

그리고 그들의 위안부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실은 영국군도 19세기에 위안소와 비슷한 시스템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영국의 여성들이 1870년대에 매춘을 국가가 공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이자, 그같은 여성은 노예라고 비판하여, 여성의 참정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원을 포섭하여 1880년대에 제대롤 폐지시켰습니다. 이런 일이 1870~80년대에 일어난 사실은 놀라운 일이죠.

부정파의 인간들은 위안부는 공창제의 매춘부이지 성노예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19세기 영국에서는 '공창제 자체가 성노예'란 의견이 다수파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현대에서도 성노동자를 조잡하게 대하고, 부친이 딸을 성적학대 및 근친상간한 행위가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남성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여성의 인권이 짓밟히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 인식이 위안부 문제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런 점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Q.또 한가지 부정파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위안부의 존재를 나타내는 공문서가 없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시나요?

林氏 공문서는 패전과 동시에 처분하라고 군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설령 남겨져 있더라도 가해자 측의 문서로는 피해의 실태는 보이지 않죠. 특히 성폭력은 가해자가 일부러 '강제로 시켰습니다'라고 쓰지는 않잖아요? 또한 해외의 공문서는 남아 있고 위안부에 대해서 묘사한 일본인 병사의 회상록도 다수 있습니다.

그같은 사실에 덧붙여 상상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조선반도에서 중국에 연행되어 성행위를 거부하고 돌아가려 한다쳐도, 어떻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군이 허가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이동도 못했습니다. 낯선 토지에서 달아나지도 못하고, 군인의 상대를 하는 걸 거부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폐업의 자유도 없죠. 종종 부정파는 '장병들과 스포츠를 하거나 소풍을 갔다'며 그녀들이 즐겁게 지냈으니 성노예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만, 인간은 가혹한 상황을 버티기 위해서는 마냥 울고 지낼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그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Q.여론조사에서는 '코노 담화의 재검토'를 바라는 사람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이미 몇 번이고 사죄했잖아, 배상했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입니다.

林氏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정부의 최초의 리액션은 1993년의 코토 담화가 있습니다. 확실히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고 말했지만 '당시의 군의 관여 아래'라는 표현에 머물러 있죠. '관여'라 함은 따로 주체가 있다는 뜻으로 군이나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심지어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코노 요헤이 씨의 담화였지, 미야자와 키이치 수상은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50년을 맞이하여 전쟁책임에 대해서 추상적・전반적인 얘기에 그쳤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했다는 15년의 한일합의는 사실 문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각각의 외무장관이 말했을 뿐이지 합의문서를 교환한 것은 아닙니다. 키시다 후미오 외무장관이 '아베 내각 총리대신은 일본국의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다'고 말했는데, 일반적인 감각으로 따져서 친구를 통해서 'XX군이 미안하대'라고 말해본들 사죄로 받아들일리 없잖아요?

또 이제까지 일본이 한국에 돈을 건넸지만 한번도 '배상'이라고 한적은 없습니다. 목적을 애매하게 해서 '입막음'으로 여겨도 별 수 없죠. 그럼에도 한국측에서 반발이 생기면 일본정부는 '이미 배상은 끝났다'고 주장하니까 이상한 일이죠.

사죄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녀상 설치를 일본정부가 반대 했는데 어떻게 반대를 할 수가 있나요? 일본에서 공습이나 원폭피해자의 위령비를 만들 때 미국정부가 '이미 끝난 일이잖아. 발칙하군'이라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또한 현재는 학교 교육 과정에서 자민당 등의 압력으로 교과서에서 위안부란 문자가 사라졌고, 문제를 가르칠 기회가 없어요. 하지만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후세에 전하는 것이 사죄입니다. 정치가의 말을 보건대 일단 '사죄'는 했지만 실제로 '사과할 마음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사죄의 뜻'이 있다면 그 자세를 계속 내보여야 합니다. 참고로 일본 총리가 직접 위안부 분들에게 사죄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Q.아시아 여성기금 때는 총리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林氏 아시아 여성기금의 가장 큰 문제는 기금을 받은 사람한테는 사죄의 편지를 보내는 구조. 돈을 안 받으면 편지도 안 보내죠. '내 사과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만 사죄할건데, 안 받아들이면 아무 것도 안 해'라는 소리는 이상하잖아요? 사죄는 피해를 받은 사람 모두에게 해야합니다.

Q.위안부의 존재 자체는 전중~전후에 알려졌지만 결정적 계기는 1991년에 한국에서 김학순 씨가 실명으로 밝힌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지원 그룹이 여럿 결성되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운이 지금보다 훨씬 컸습니다.

林氏 그전까지는 누가 피해자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보상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죠. 그녀들이 이름을 밝히면서 사죄하고 보상해야한다는 의식으로 전환됐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90년대는 일본인은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고, 우리들 손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속죄하여, 그 불행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나 자신감이 있었죠. 자국의 악행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입니다.

동시에 국제사회 자체가 90년대에 크게 달라졌습니다. 냉전체제가 끝나고 다양한 국가범죄를 드러내어 국가에 의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을 보상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단숨에 부상했죠. 전시 성폭력도, 문제를 오랜세월 방치하여 인권침해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분쟁에 관한 전쟁범죄를 재판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 법정을 계기로 기존의 국제사회가 전시 성폭력을 외면했던 점에 관한 반성을 하게 됐죠. 전시성폭력을 애매하게 다뤘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직면하게 됩니다.

또한 냉전종결과 동시에 전세계에 인신매매가 확산됐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앞서 말씀 드렸듯 폭력적인 납치만 있는 게 아니라 인신매매가 아주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죠. 국가에 의한 조직적 인신매매 문제라는, 전시 성폭력과는 별개의 측면으로의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게 됐습니다. 국제사회는 평화국가가 된 일본은 그같은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규범을 선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인신매매에 대해서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잡아떼고, 전시 성폭력도 인신매매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죠.

Q.위안부 피해자의 대부분이 고령자이고, 이미 돌아가신 분도 많습니다. 그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해결은 시급한데, 배상금을 포함해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전쟁책임을 지는 문제나, 몇 번이고 사죄・배상을 하지 않았냐는 의문이 우경화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이어져 있다고 봅니다. 전재을 모르는 세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林氏 우선 배상에 관해서는 아베 내각이 미국을 통해 1기에 100억엔 이상하는 전투기를 100기 이상 구입할 예정인데요 한일합의로 일본이 지불한 금액은 그 전투기 1기의 1/10입니다. 그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계속되는 한, 그 수혜를 입었다면,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피해자한테 보상하는 게 당연한 일이죠. 일본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여성의 인권을 짓밟은 사회의 가치관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과거를 통해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거죠. 그런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와 마주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한국은 활발한 ♯MeToo운동과 연동해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젊은 세대가 늘었습니다. 한국도 타국과 마찬가지로 성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피해자를 욕보이는 사회라서 위안부 피해자가 50년이나 스스로 나서지 못했죠. ♯MeToo운동을 통해서 그같은 사회를 바꾸자, 성폭력은 피해자가 부끄러워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해가 확산됐고 위안부 문제와 젊은 세대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있지만, 최소한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인식을 전환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감안하면 현재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의 대립관계의 원인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셔널리즘의 다툼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인권침해 문제로 봐야 하겠죠.

또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일본의 남성이 더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안소 앞에 일본군 병사가 줄지어 서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잖아요? 몇 분마다 남자가 계속 들어가죠. 즉 남자 병사들도 제대로된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은 문제인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남자의 인간성도 훼손당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남성들이 이 문제를 깨우쳐야 한다고 봅니다.

Q.2편에서는 경시된 남성의 인권과 남성성을 이용한 일본군의 성적 컨트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의 군과 병사의 공존관계에 대해서 여성사・젠더 연구가인 히라이 카즈코 씨의 해설이 있겠습니다.


덧글

  • 나인테일 2019/08/09 15:28 # 답글

    야쿠자를 방목시킨 결과가 ‘강제연행은 없었다’가 되는 것이로군요. 요즘 세상에도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게 더 골때리네요.
  • 2019/08/09 20: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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