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와카-안쓰러운 꽃미남의 시대 라노베



꽃미남은 스테이터스다. 희소가치다. 일찍이 타케쿠마 켄타로는 <원숭이도 그릴 수 있는 만화 교실>에서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상대역, 즉 주인공의 연애대상이 되는 존재가 60년대라면 '다카라즈카에서 튀어나온 근사한 왕자님'이었는데 70년대에는 '절망적으로 비현실적인 왕자님에서 다소나마 현실적인 외국인'으로 변했다고 평했다. 이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운동부의 귀신 코치' '운동부의 캡틴' '일진'을 거쳐 80년대 말미에는 '로커' 즉 밴드맨이 순정만화에 있어서의 주인공 상대역으로 가장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는 유형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서 타케쿠마가 말하고자 한 바는 요컨대 과거에는 비현실적이었던 연애대상이 '일진'에 도달했을 만큼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타케쿠마는 총괄적으로 다음과 같은 서술을 남겼다.

'천상계에서 하계로, 하계에서 공동체로 변화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그 아무리 타락할 지언정, 기저에는 여성 구미에 맞는 '다정함'이 필요하다는 게 순정만화 남성상의 철칙입니다.'

타케쿠마는 일부러 디테일한 점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애초에 이 '철칙' 앞에 그 남성이 미남이라는 암묵의 룰이, 당연한 것처럼 첨가돼 있다. 왕자님이나 귀신 코치라는 이유로 외모를 도외시하는 게 아니라, '다만 꽃미남에 한한다'는 조건은 언제나 딸려온 것이다. 타케쿠마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외국인'에 관해 보충 설명으로 '하체 2미터가 절대조건'이라고 써놓았고 '일진'도 리젠트, 수염, 선글래스처럼 양아치로 보이는 용모가 아니라,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미소년이 담배를 태우는 정도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도해를 그려놓았다.

이는 순정만화의 사례지만, 픽션이 으레 서로 비슷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황급히 첨언을 해두자면 여성향 컨텐츠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남성향에 등장하는 여성의 외모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게 잠재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사람은 생긴 게 9할'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최저조건으로 외견을 요구하는 사람은 많다.

또 이 역시 80년대말부터 90년대 전반기까지의 이야기인데 '3고(高)'라는 표현도 있었다. 여성이 결혼상대를 선택할 때 고수입, 고학력, 고신장을 조건으로 갖춘 상대가 바람직하다는 그야말로 고도성장기의 피크에 달한 버블 경제 시대를 실감케 하는 유행어다. 다만 이렇게 남성을 품평하는 듯한 표현은 격조가 없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인만 그런 성향을 가진 게 아니다. 이를테면 영국도 elgible bachelor라는 단어가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예로부터 쓰이고 있다. 일본의 여성향 패션잡지 <AneCan>의 2012년 7월호에는 이 단어를 따온 '에리지블 멘즈'라는 단어가 '결혼에 적합한 남자'라는 설명을 곁드려 표제어로 쓰였다.

하여간 지금 이 자리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물론 당시에 3고를 원한 수많은 여성이 그 기준을 충족했다 할지라도 얼굴은 못나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고신장'이란 명백하게 외모를 중시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순정만화에서 '외국인' 하체가 2미터는 필요하다는 점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꽃미남이 필수요소고 그걸 전제로 다양한 기호가 발생하는 것이다.

거듭 되풀이하는 소리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는 80년대말부터 90년대에 걸친 이야기로, 현재는 다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속어 대사전>에는 '세간에서 요즘 세상에 한물 간 삼고 도련님'이라는 항목이 있다고 한다. 이 기술대로라면 2000년대에 접어들 무렵에는 이같은 지향은 희박해졌다는 뜻이 된다. 근자에는 더 나아가 요즘 결혼의 조건으로 여성이 바라는 건 '3고'가 아니라 '3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3저란 '저자세' '저의존' '저리스크'를 뜻하는데, 즉 전반적으로 위압적이지 않고, 배우자에게 내조를 강요하지 않으며, 장래에도 살림살이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견실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쉽게 이해가 가는 한편으로 억지로 3고라는 유행어에 끼어맞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게 근거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요즘 여성이 바라는 결혼의 조건은 그밖에도 많이 있다. 3C(comfortable, communicative, coperative)나 3K(가치관이 맞는다, 금전감각이 맞는다, 고용형태가 안정돼 있다)니 3평(3平=평균적인 수입, 평균적인 외모, 평온한 성격). 혹은 앞서 언급한 3저에 저연비를 추가한 4저까지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나 요구사항이 많으면 대체 어느 게 정답인지, 오히려 모든 게 오답이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즉 이같은 현대적인 조건이 타당한지 여부는 결국 알 수 없다. 애초에 3K는 독신여성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인데, 조사대상은 35살에서 44살까지로 과거에는 3고를 원했던 당시의 20대 여성이었다고 가정해보면, 기호가 일치하지 않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곤 하나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이같은 '조건'이 총체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건 역풍을 맞지 않고 평온무사함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버블 시대와 대조적으로 오래동안 이어진 불황의 시대를 반영한 발상일 것이다. 이를 통해 드는 생각은 포스트 3고에는 과거의 3고 중에서 고신장에 해당하는 것, 즉 용모의 좋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없다는 사실이다.

타케쿠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상계에서 하계로, 하계에서 공동체로 변화해온 이상적인 남성상이, 마침내 외모조차 보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회의적인 생각은 그럼에도 외모라는 기준은 지금도 여전히 잠재적으로는 가장 중시되는 가치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사실을 통해 별개의 사안을 고찰하게 된다. 타케쿠마는 일찍이 왕자님처럼 비현실적이었던 연애대상이 현실적인 남성상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순정만화에 일종의 리얼리즘이 요구됐다는 의미이고, 현실세계의 elgible bachelor가 3고보다도 견실함을 요구하게 된 '리얼리즘' 즉 현실적인 판단과 서로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명시적으로 배제되는 비현실적인 연애대상, 다시말해 '왕자님'으로 집약되는 용모수려한 남성상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래도 현실세계와 대치되는 비현실=픽션의 영역으로 쫓겨났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사회학자 미타 무네스케가 <현대 일본의 감각과 사상>에서 주장했고 오사와 마사치가 <허구 시대의 끝> 등의 저서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한 유명한 시대구분법이 있다. '현실'이라는 단어의 반의어로 '이상' '꿈' '허구' 세가지가 있다고 가정하고, 제 각기 고도성장기부터 버블붕괴후까지의 일본인의 현실감각의 변천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꽃미남은 일찍이 '이상'으로 추구하는 게 가능한 존재였지만, 이윽고 불황을 맞이해 '허구' 그 자체가 되었다는 소리다. 현재는 꽃미남은 희소가치 운운할 형편도 못된다. 그는 현실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사멸했고 이상이나 꿈을 통해서 충족시킬 수 있는 픽션에만 생식하는 허구의 사나이인 것이다.

이 구분법은 미타가 제창한 것이지만, 오사와는 여기에 '불가능성'을 추가해 19956년 이후를 <불가능성의 시대>라고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허구를 과도하게 추구함에도 좌절감을 경험한 일본인은 이제 모든 허구를, 거짓말이라고 인지한 상태에서,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확실히 오늘날 배우나 뮤지션, 아이돌, 혹은 점원이건 문학가건 그냥 아는 사이건 뭐가 됐건, 그가 꽃미남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원래 이 표현은 현실적인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그의 아름다운 육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허구적인 꽃미남성을 두른 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는 꽃미남을 연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끝내주는 남자'를 의미하는 이케멘이라는 단어가 미디어의 선도로 '캐릭터'로 상정됐을 것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서두에 '꽃미남은 스테이터스다'라고 썼지만 오늘날 스테이터스라는 단어는 게임용어로, 캐릭터의 능력치나 속성정보를 의미로 경화됐다. 인간은 캐릭터, 즉 스테이터스 정보를 연기한다. 그리고 그 연기성이란 결코 연기하는 쪽의 자세에 따라 좌우되는 게 아니라, 수용자인 우리가 그들이 연기하는 '이상'이나 '꿈'이나 '허구'를 믿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꽃미남은 이처럼 그들이 진정한 '왕자님'이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즉 픽션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믿는다는 시니컬한 존재일까?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서는 '안쓰러운 꽃미남'에 관해서 고찰해볼까 한다. 새삼 설명하는 것도 뒷북인 감이 들지만, '꽃미남인데 오타쿠'나 '꽃미남인데 소심함'처럼 '꽃미남'이라는 미점을 지워버릴 법한 면모를 지녔음에도 그렇기에 단순한 꽃미남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남자를 의미한다.

오사와는 전술한 '굳이 믿는다'는 태도를 '아이러니컬한 몰입'이라고 표현했는데 사회규범이나 가치가 상대화된 시대에 있어서의 냉담한 애니메이션 팬, 소위 오타쿠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 오사와의 의론은 이후 서브컬처를 논할 때마다 빈번하게 참조되었는데, 필자가 지금 주목하는 것은 그와는 별개의 부분이다. 오사와의 <불가능성의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단락이 있다.

예를들어 우리는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미인'이나 '흠잡을 데 없는 우등생'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만약 '완전하게 균형이 잡힌 미인'이 있다면 '무척 지적이고 도덕적으로도 완전한 남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그녀는 어딘가 매력이 결여돼 있고, 정열을 이끌어낼 계기나 단서가 없다는 인상을 사람에게 주지 않을까? 즉 특이한 결점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오히려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은 그야말로 우리들이 '안쓰러운 꽃미남'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이유를 묘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오사와가 말하고자 한 내용은 이보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좀 더 인용해보자.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증오'로도 이어질 수 있는 특이한 결점이나 균열을 보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개념이 지향하는 것과 실제로 사랑받는 것이, 그 특이한 성질의 직접적/적극적인 현상형태로 회수될 수 없는 과잉성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사와가 어디까지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미인'이나 '흠잡을 데 없는 우등생' 등을 이상으로 상정하면서도, 거기서 탈선한 '안쓰러운' 요소를 포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꽃미남한테 아이러니컬한 몰입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다시말해서 꽃미남이라는 사실이 이미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그 결점에 해당하는 부분도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안쓰러운 꽃미남'이란 단어는 꽃미남에 옥에 티로서의 '안쓰러움' 요소가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는 발상으로는 성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인물에게 '꽃미남'이라는 캐릭터와 '안쓰러움'이라는 별개의 캐릭터를 동시에 겸비하게 함으로써 가치가 생겨나는 셈이다. 꽃미남이라는 단어가 철저하게 미남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안쓰러움' 요소가 추가된 시점에서 그는 꽃미남이 아니다. 그러나 꽃미남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다른 요소와 경합가능한 표층적인 속성=캐릭터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안쓰러운 꽃미남'이라는 표현이 성립하는 것이다. 

'안쓰러움'은 심각한 네거티브함을 잃고, '꽃미남'도 본질적으로는 미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쪽 다 가치면에서 균등한 캐릭터의 일환으로 어느 인물에게 부가할 수 있는 속성이 된 것이다. 동시에 이같은 속성은 경합이 가능하며, '안쓰러움'과 '꽃미남'은 '안쓰러운 꽃미남'으로 매시업되어 비로서 사랑스러운 가치관으로 나타난 것이다.

필자는 2014년에 <10년대 문화론>을 통해 이 '안쓰러움'이라는 단어가 상대적으로 포지티브한 의미로 쓰이게 된 시점이 2007년 언저리이며, 그같은 가치관이 일본의 2010년대 젊은이 문화를 특징하는 새로운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필자의 이 주장은 '안쓰러움'이라는 단어가 10년대 사회 전체의 멘탈리티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는 주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현대 일본의 방향성이 일종의 빈곤함을 사랑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얘기가 아니다. 

필자가 보다 중시하고 있는 점은 '안쓰러움'이라는 단어가 남한테 가볍게 추가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됨으로써, 그 네거티브한 의미를 누그러트렸다는 뜻이다. 그 근거로 졸저에서 '안쓰러운 미녀'나 '안쓰러운 미소녀'라는 단어가 인터넷에 등장한 시기가 2007년 전후라고 말했는데, '안쓰러운 꽃미남'이 인터넷에 등장한 시기를 조사한 결과 믹시에 '안쓰러운 꽃미남'이라는 커뮤니티가 창설된 게 2007년 11월인 모양이다. 설명문에는 '그 사람 잘 생기긴 했는데...'라며 안쓰러운 측면이 있는 꽃미남을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때로는 웃음거리로 삼는 커뮤니티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구체적인 예로 토쿠이 요시미, 이노우에 사토시, 카토 카즈키, 후지키 나오토 등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

믹시의 커뮤니티는 유저들이 만드는 팬클럽 같은 개념으로 안쓰러운 꽃미남이 얼추 포지티브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고려할 부분은 '꽃미남'이 '안쓰러움'과 대칭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용모라는 기준이 잠재적으로 가장 중시된다는 점과, 이미 어긋난 사태이다. 일찍이 꽃미남 즉 미는 그 자체로 달리 비교할 데 없는 가치였으며 그걸 전제로 남성은 코치니 일진이니 고수입이니 하는 특징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의 꽃미남이란 다른 속성과 조합하기 위한 소재의 하나가 되어, 말하자면 다른 가치와 동등한 수준으로 격이 떨어져버렸다. 거듭 말하지만 이게 사람들이 그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미남이라는 우위는 그 자체로 유지되고, 또안 존중받는다. 다만 그 가치는 상대화되어 버린 것이다.

단순한 얘기로 세상에 꽃미남의 숫자가 너무 많이 늘어나버린 바람에 용모가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로는 주목받지 않게 됐으며 인기를 획득하려면 '잘나지 않은' 부가 가치까지 요구받게 되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확실히 '안쓰러운 꽃미남'이라는 개념의 창출은 용모에 지나치게 고집한 남성의 퍼포먼스를 평가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되었다. 작금의 비주얼계 뮤지션이나 코노미 타케시의 <테니스의 왕자>(물론 뮤지컬도 포함)의 등장인물 등 많은 여성향 작품에 전형적으로 표출되고 있을 것이다. 꽃미남 즉 남성에게만 국한 된 것도 아니고, 여성 아이돌이나 탤런트, 이차원 미소녀도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오사와 마사치가 2000년대 후반에 논한 완벽한 아름다움보다 특이한 결점을 보유한 사람에게 품는 애정이란, 추구해야할 '현실'에 대한 단념을 기초로 나타난 것으로, 그것은 '굳이'라는 형태로의 아이러니컬한 몰입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시니시즘을 베이스로 삼은 종래의 오타쿠상과도 이어진다.

하지만 2010년대의 오늘날 사람들이 맞이하게 된 것은 적어도 그같은 시니시즘이 아니다. 즉 이미 그같은 '오타쿠'상도 과거의 것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해는 갱신되는 일 없이, 다른 팝컬쳐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설명이 통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말로 가치상대주의가 극한까지 도달했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네거티브한 가치관조차 상대화시켜, 매시업의 소재로 삼는 시대인 것이다. 

그같은 시대적 정신의 시시비비를 여기서 필자가 판단하지는 않겠지만, 거기에 윤리가 요구된다면 개개의 가치관보다도 먼저, 그 선택이 얼마나 자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성의 시대' 끝에 이르른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슬슬 '현실'로 대처해야 한다.


요컨대 같은 오타쿠라도 이즈미 사기리 같은 히키코모리 미소녀를 두고 그 폭력적 성향에 질색팔색한다거나 등골 브레이커 운운하며 현실에 빗대어 흠결을 따지면 덜 혼모노, 어차피 현실적인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결점마저 꼴리면 그만이라 익스큐즈 해버리면 갈 데까지 가버린 혼모노라는 뜻으로...그릏케 살믄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 보자는 얘기가 아닌가 하는데...앙 사기리띠~



덧글

  • 살모넬라 2017/09/24 17:57 # 답글

    그 연기성이란 결코 연기하는 쪽의 자세에 따라 좌우되는 게 아니라, 수용자인 우리가 그들이 연기하는 '이상'이나 '꿈'이나 '허구'를 믿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이거 완존 니혼 엔터테인먼트의 정신 그 자체...
  • 살모넬라 2017/09/24 17:58 # 답글

    안쓰러운 꽃미남을 사랑하는 더 안쓰러운 혐생 오타끄들....
  • 의지있는 크릴새우 2017/09/24 22:26 #

    팩트로도 때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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