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 키노코 "나의 혼을 상징하는 것" 달빠


https://twitter.com/touco_shino/status/887455577781161984

Q.나스 씨가 이쿠하라 작품을 접한 건 언제였나요?

나스 키노코 "개인적인 첫 이쿠하라 쿠니히코 작품은 <소녀혁명 우테나>입니다. 작금의 40대 전반 크리에이터들에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걸친 창작체험은 언제까지나 손톱 자국으로 남아있는 법입니다. 저한테 처음으로 닥친 충격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전부 담겨 있어서 당연히 대미지를 입기도 입고, 영향도 받았죠. <에바>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동전함 나데시코>가 시작됐고, 그리고 <우테나>입니다. 가장 빛나던, 톱랭크의, 일종의 카리스마로 자리할 애니메이션이 연달아 등장한 시기입니다."

"친구들은(물론 남성) '뭐야 이 그림체는!?'라며 일종의 거부반응과 가까운 반응이었습니다. 저는 순정만화에 익숙했던지라 '이 캐릭터 디자인 좀 괜찮네. 근데 애니메이션으로 보기에는 좀 지나치게 탐미적일지도...'라고 생각했던 게 첫인상이었죠. 거부감이 적었던 이유는 타케미야 케이코 선생님의 <지구로...>를 좋아했던 이유도 있었겠고요."

"하지만 막상 시청하고나니 그림체가 아니라 내용 그 자체가 너무나 다른 문화권이라, 이해력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반복해서 보게 되는 겁니다. 언뜻 보기에는 탐미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의 이면에 굉장히 섬세하고 우화적인 내용이 존재했어요.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시청자가 채널을 돌려버릴 타이밍에 당당하게 추상적인채로 표현하는 기법을 <우테나>는 1화부터 저질렀죠."

Q.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채로 표현한다.

나스 키노코 "네. 우테나도 돌아가는 펭귄드럼도 유리쿠마 아라시도 핵심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고 '요컨대 이런 내용이잖아?'라고 단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해버리면 끝입니다. 추상적인 것에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 개인의 주관으로 단정한 답을 내밀어 본들 '타인이 본 상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죠. 이미지를 이미지인채로 전달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처럼 추상적인 것을 표현으로써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작업을 이쿠하라 감독은 그 시절부터 계속 해왔어요. 우테나는 대사는 완곡하지만, 연출이나 미술은 모든 것이 비비드. 세계를 표현하는 이미지의 외피가 엄청 강력해서 굉장한 예술을 봤다,고 말하면 호들갑이 심할지도 모르겠지만, 1화 시점에서 그런 충격이 밀려왔어요."

"그냥 휘둘렸죠. <절대운명 묵시록>의 뱅크씬이 흐르고, 결투가 있고, 그리고 엔딩이 흐르죠. '이건 걸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을 만인에게 전달하기란 불가능하겠구나'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작품을 언제까지고 가슴에 담아두는 사람이란 똑같이 젠더 문제로 괴로워할 여성 유저나, 아니면 앞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표현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일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흑장미편> 정말 좋아합니다. 1화에 기승전결이 알차게 담겨있죠. 교수가 '당신이 나아가야할 길은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알리고, 결투신이 있고, 우테나가 승리하고, 관이 소각로에 떨어집니다...그렇게 반복되는 장면이 무척 즐거워요. 애니메이션 각본 집필을 맡게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 구성력의 굉장함을 이해하게 됐어요."

"뱅크신이나 흑장미편의 구성은 당시의 제작환경의 한계,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 것이죠."뱅크신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면서 즐거운 뱅크신을 만들고자 생각했다고 이쿠하라 씨는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하지만 정말 그걸 실현해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작금의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은 뱅크신을 만들지 않아도 22분의 방송을 만들어내는 우수함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인력도 부족하고, 디지털툴도 거의 없고, 자료도 검색한다고 바로 나오는 상황이 아니죠. 그런 상황에서 이만한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경이적입니다. 솔직히 초인입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만, 우리보다 한세대 전의 인간은 아마 지금의 갑절은 될 고생을 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기에 창의력이 발휘되고, 밀도가 견줄 데가 없습니다. 또 우리들의 발상의 영역 바깥에서 날아옵니다."

Q.캐릭터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스 키노코 "물론 전부 좋아합니다. 위화감을 느낀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어요.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를 들라고 하신다면야 주역인 두사람이죠. 애초부터 '남장 소녀'랑 '여장소년'은 좋아하는데 텐죠 우테나와 히메이야 안시는 '어? 이 시대의, 이 시간대에 이런걸 하는거야!?'라는 생각이 들고요."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하는 속박에 맞서 소각하고자 드는 우테나와 (강요당하는 여성상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안시. 안시라는 캐릭터는 소름끼치는 게 처음에는 인형인가 싶었는데 이해를 하면 하게될 수록 무섭게 느껴집니다. <우테나>라는 이야기는 그런 두사람의 교감이랄지, 교감하는 척 행세를 하는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지 어차피 아키오 씨는 그 두사람의 구석탱이에 존재하는 배경에 불과하다고요!"

"우테나는 싸움 끝에 패배하지만, 안시는 그같은 모양새로 자신의 상처에 결착을 냈죠. 39화를 전부 본 다음에 오프닝을 다시보면 엄청 빛납니다. 1화 오프닝부터 39화까지가 하나의 원이라서, 그대로 빙글빙글 보게 됩니다. <에바>도 그렇지만 <우테나>는 백 번을 봐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입니다."

Q.우테나와 안시의 관계성이 크게 변한 33화 <밤을 달리는 왕자>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스 키노코 "그 밤을 달리는 왕자말이군요? 야밤의 고속도로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아키오 씨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뭐야 뭐야 이 연출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지루한 20분이 이어지죠. 그리고 마지막에 터무니없는 2분을 선사해버려요. '이거 다음주는 어떻게 되는거야?'라고 말하곤 말문이 막힌 기억이 나네요. 저는 남성이니까 그때까지 순결을 지키던 히로인이 아키오한테 마침내 넘어가는 내용에 혐오감은 크게 들지 않았어요."

Q.의외네요. 남자가 충격이 더 크지 싶은데요.

나스 키노코 "야마다 후타로나 키쿠치 히데유키의 전기소설에서는 약속인 걸요...아니 그보다 이렇게 위험한 몬스터랑 야밤에 드라이브에 가면 잡아먹히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본래 불가침영역이었을 터이고, 순결을 메인 테마로 잡은 듯한 히로인을, 그런 식으로 추락시키는 점에서 각오라고 해야할지, 오오 얼버무리기가 없다는 진심을 느끼고 자세를 고쳐잡았습니다. 우테나는 저녁시간대에 보는 오락이긴 하지만 문학에 발을 내딛었구나라고요."

"<이야기>의 정의 중 하나로 '등장인물이 성장하는 것'이란 게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테나는 성장보다는 탈피를 한 캐릭터. 작중에서 본인이 바라지 않았음에도 한꺼풀 벗어버렸죠. 그 때 아키오 씨한테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테나는 이야기에 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는 안시의 어둠에 다가서지도 못했을 거고, 아키오 씨의 즐거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겠죠. 순결이라는 주인공성을 잃어버리고 '기타등등'이 되었기에 이야기의 바이어스에서 해방되고, 그 왕자님의 꿈을 간접적이긴 해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고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Q.말씀을 듣다보면 아키오에 대한 일종의 애정이 느껴지는데요?

나스 키노코 "그렇죠. 아키오는 임팩트 덩어리니까요. 이런 캐릭터 어떻게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걸까요? 보스로서도 압도적이고 캐릭터로서도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으로 최악. 이쿠하라 씨 작품의 악품은 다들 구제할 도리 없는 악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련하죠. 문답무용으로 멋진 어른인데 가장 보답받지 못한채로 그 세계를 만들고, 아이들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어요. 그렇다는 것은 그 세계에서밖에 빛나지 못한다는 의미니까요."

"남성 캐릭터는 아키오 말고 사이온지 쿄이치도 좋아합니다. 다들 어렴풋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Fate/stay night의 마토 신지 디자인은 '역시 남자 친구 포지션의 캐릭터는 머리가 웨이브여야지!'라고 생각한데서 탄생했습니다.(웃음)"

Q.TV판이 방송된 게 1997년. 1999년에 극장판이 개봉됐습니다.

나스 키노코 "TV판 우테나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건너편에 있는 거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야 부담감이 더 심했겠지만, 저야 맞은 편 강에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생각한 몇 년 후, 뒤늦게 본 극장판에서는 작가로서 한방 먹었습니다. 극장판의 무서운 점은 TV판과 같은 관계성으로 진행되는데도, 초반 5분만에 '이건 TV판이 멸망한 다음의 디스토피아 세계구나. 오오토리 학원에 속박된 고스트들이 다시 한번 답을 찾는 이야기구나'라고 전해져옵니다."

"그런 고도의 작업을 1시간 반만에 해버립니다. TV판에서 남겨놓은 설정이나 '사실은 더 나은 엔딩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일종의 아쉬움이 우테나라는 작품을 시청자들 마음에 남겨두게 만드는데요 극장판은 파워업한 IF로 마음을 울렸습니다."

"극장판의 우테나와 안시는 TV판과는 정반대 포지션의 캐릭터잖아요? TV판은 알껍질은 깨트렸지만 혁명은 일으킬 수 없었어요. 새는 확실히 알을 깨고 나왔죠. 하지만 죽었다는 세계. 극장판의 두사람은 알을 깨고 이제부터 날개짓하려 합니다.

(중략)

"창작자는 아마 두종류가 있을 겁니다. '아이가 독립하면 다음 아이로 애정의 대상이 옮겨가는 타입'과 '자기 아이인 이상, 죽을 때까지 돌봐주고 싶은 타입' 저는 후자입니다. 설령 딸이 결혼을 했더라도, 시집살이를 하며 괴롭힘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고 싶죠. '우리애는 수영선수인데, 프로레슬링을 시킬 것 같아...'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럼 우리애도 프로레슬링 잘 하게 단련시킬래요!라는 생각이 들죠. 그 경향이 현저한 게 FGO일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더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Q.펭귄드럼에 대해 묻겠습니다. 1화 방송 당시 웹사이트 타케보우키에 감상을 적으셨죠.

나스 키노코 "펭귄드럼의 완성도는 발군입니다. 보다 대중적인 캐릭터 디자인, 배색임에도 언제나의 이쿠하라 미술이 작열하고, 테마는 <사랑>. 조건없이 사랑받은 자와 조건없이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대립. 이 영원한 테마를 소년소녀의 이야기로 그려낸다는 엄청난 일을 했어요. 영상표현은 추상적인 걸 추상적인 채로 말하는 '진정한 센스'라고요."

"하지만 <우테나>도 그렇지만 너무 고도의 이야기라 진심으로 이야기와 어울리는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맛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단 그냥 멋이나 기발함으로 이쿠하라 월드에 들어와주세요. 그다음에 얼마나 파고들 건지는 당신 자유랍니다.←이런 자세를 철저하게 관철한 느낌입니다."

"12년만에 애니메이션 시리즈 신작 PV를 봤을 때 '이쿠하라 씨가 돌아오는 예감을 느꼈다!'고 흥분이야 했지만, 그 때는 아직 반신반의였어요. 그랬는데 1화를 보고 그 록함에 감동했죠.(웃음) 이쿠하라 작품을 모르는 인간이 프린세스 오브 더 크리스탈의 <생존전략>을 본다면 뜬금없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우테나>로 이 뱅크가 앞으로의 핵심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죠."

"생존전략이라는 단어는 자연계에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걸 펭귄 차림을 한 미소녀가 말하면 굉장난 파워워드로 들립니다. 살아가는 게 점점 편해지는 이 세계에서 고교생 두사람을 향해 생존전략을 내밀며 '이대로 그저 살아간다면, 산 것인지 모른채로 죽는다. 너희들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찾아라'라고 선언하죠. 멋있어서 몇 십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Q.1995년을 키워드로 지하철 사린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죠.

나스 키노코 "솔직히 왜 지금 사린 사건을 다루는 걸까?라고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도 많고, 아직 창작의 소재로 취급해도 괜찮은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쿠하라 씨 본인이 '풍화되기 전에 해야 의미가 있다. 똑바로 상흔을 상흔으로 남기자'고 강한 의지를 가지셨다는 걸 알고 이중의 의미로 백기를 들었습니다.'

"펭귄드럼의 캐릭터도 전부 좋아하지만, 지금은 주인공 그룹보다 사네토시 선생님한테 마음이 가네요. 아니 정말 엄청난 캐릭터 조형이라구요. 오프닝 영상에서 핑크색 머리칼에 새하얀 롱코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오죠. 명백하게 보스고, 아키오 씨와는 다른 벡터로 최악의 쓰레기라는 게 한눈에 보이는데 존나 멋있어요. 내가 중고딩이었다면 '나도 장래에 머리를 핑크로 물들이고 흰코트 입고 짜릿한 걸이라고 말하고 싶어!'라고 여기게 되었을지도..."

"최종화는 모든 게 아름다워서 지금도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다가 엉엉 울었습니다. 펭귄드럼은 본래 조건없이 사랑해줄 터인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사랑받지 못한 주인공 일행이 저마다 낙오자로서의 어깨동무를 하고 살고 있는 이야기. 칸바 일행은 유대를 남기지만, 사네토시 선생님은 또 다시 남겨집니다."

"사네토시는 조건없이 영원히 사랑받지 못한 인간의 대표. 그 대칭에 자리하는 게 조건없이 누구나 사랑한 오기노메 모모카. 두사람이 만났지만 모모카는 '하지만 난 그만 갈래'라며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사네토시 선생님은 그 자리에 남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나도 따라 갈래!'라고 말하고 모모카의 사랑을 받으면 됐을텐데.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했던 게 유일한 프라이드라서, 그걸 굽힐 수 없었죠. 사랑이니 뭐니 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걸 우선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점에 로망을 느끼게 되고, 가장 울림이 컸습니다."

"엄청 잔혹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펭귄이나 강렬한 키워드로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죠. 입구는 귀여운데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박살나게 됩니다. 메시지성은 우테나보다 강해졌다고 봅니다."

Q.프린세스 오브 더 크리스탈의 '분명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너희들에게 고한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창작자를 목표로 하는 많은 사람들 가슴을 찌르는 문장이 아닐까 싶은데요.

나스 키노코 "창작자가 아니라 관객으로 끝나버린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였다는 말씀이시군요? 저는 작가라는 입장을 얻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라면 심층의식에서는 안전권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느쪽인가 하면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전부 거짓된 것. 사람에게 살아받고,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상 그 무엇도 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창작자는 사랑보다 자기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네토시 선생처럼 운명의 사과를 나눠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를 자기 손으로 뭉개버리거나, 사과를 혼자서만 먹어버리는 일도. 취미에 살고, 일에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자기만 보다간 무엇도 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Q.2015년에는 <유리쿠마 아라시>가 방송됐습니다.

나스 키노코 "유리쿠마 아라시는 1쿨안에 컴팩트하게 이쿠하라 감독의 모든 것, 이쿠하라 기믹의 모든 게 담겨있죠. 이쿠하라 필터를 통해 엉청 멋있어진 거리의 광경, 몇 번을 봐도 안 질리는 뱅크, 파워 워드, 실은 테마를 직접 말하는 장면, 사회의 시스템에서 소외당하는 주인공...쿠마쇼크!처럼 원래 넣으면 안 될 타이밍에 강렬한 대사를 넣어 재미를 유발하는 것도 이쿠하라 씨의 독특한 센스"

"스토리는 다양한 고찰이 있겠지만, 식인곰은 동성애자나 바이 섹슈얼과 같은 사람들의 메타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줘'라고 세간에 메시지를 보내지만, 사회는 압도적으로 박해하고 강철의 제재를 가합니다. <우테나>도 비슷한 테마였지만 세계를 혁명하고자 들었죠. <유리쿠마 아라시>는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게 불가능했으니, 우리는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래요라고 말하는 이야기였죠."

"똑같은 소리를 해봤자 시시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당사자들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고도 생각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세계에 패배하고 말았다'는 게 슬펐어요. 하지만 1쿨이니까 그 결말로 된 걸지도 몰라요."

Q.인상깊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나스 키노코 "12화 전체가 한편이라는 이미지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이쿠하라 씨는 대단한 걸. 용케 15분 분량으로 이런 게 가능하네'라고 생각하고 반복해서 본 거는 4화 <나는 키스를 얻을 수 없어>입니다. 루루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나타내는 옛날 이야기로 우화성이 극도로 강해서 보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거예요. 4화를 보면 하마조차 철학을 하기 시작할걸요! 루루는 가장 자기맘대로 사는 애이려나 싶었는데 가장 사려깊고 대견한 아이였죠."

Q.나스 씨는 Fate/stay night의 사쿠라 루트나 Fate/EXTRA CCC 등 여성의 정념을 그리는데 정평이 나있습니다. 

나스 키노코 "여성 형제가 있었던 게 컸다고 봅니다. 소년만화도 순정만화도 같은 책장에 꽂혀있고, 둘 다 읽었죠. 여러 작품을 읽다보니 읽으면서 재밌는 게 소년만화. 이야기가 재밌는 게 순정만화라는 견해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마음에 자리잡혔습니다. 심지어 순정만화도 타케미야 선생님을 대표로 하는 SF순정만화랑 양키순정만화 두종류가 있었거든요. 그 두개를 어릴 적부터 줄곧 읽었죠. 한때 잠시 멀어지기도 했지만, 대학생 때 <나의 지구를 지켜줘>랑 <여기는 그린우드>와 만나게 됩니다. 역시 굉장히 재밌다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뒷북이나마 히무로 사에코 선생님 작품도 읽게 됐습니다. <이 얼마나 근사한 재패니스크>로 입문했는데 문체가 경쾌하고 읽기 쉬운데다가 캐릭터의 사고 루틴도 취향. 하지만 나는 헤이안 덕후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푹 빠지는 않는단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아는 누나가 '내 생각에 나스 군한테 맞는 작품은 이쪽'이라며 책을 빌려주셨죠. 그게 히무로 선생님의 데뷔작 <안녕 아를를캥>과 81년에 출간한 <사랑하는 여자들> 거기에 푹 빠져 계속 읽어나갔습니다. <클라라 백서>는 지금도 제 바이블인데 애독용/보관용 두권이 꽂혀있습니다. 지금도 여자 기숙사물 중에서는 개인적인 정점으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공의 경계>"

Q.으음? 그야 공의 경계의 망각녹음은 여자 기숙사가 무대인 작품이지만요, 뭔가 좀...

나스 키노코 "뭔가 좀 이상하죠? 하지만 제 작풍에 소녀소설적인 토대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Q.Fate 시리즈의 원형도 주인공이 여성이고 히어로가 아더왕이라는 소녀소설적인 작품입니다. 그 작품이 탄생한 것도 비슷한 시기인가요?

나스 키노코 "페이트 프로토타입은 고교 시절에 썼으니까 소녀소설 문화에 빠지기 전이죠. 고등학생 때는 소설은 키쿠치 히데유키의 전기물만 읽었고, TV나 애니메이션은 금지당했거든요. 제가 본 첫번째 애니메이션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당시부터 오타쿠 친구였던 타케우치 타카시한테 '나스 애니는 안 봐? 가이낙스란 사람들의 최신작만이라도 봐라!'라는 권유를 받고 몰래 봤다가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가이낙스 접점으로 본 <에바>로 애니의 재미를 알게 됐습니다."

'내 인생이 망가져도 좋다.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의 충격. 그전까지는 무서웠거든요. 꿈도 있었고 내 재능에도 그런대로 확신은 있었지만 '이 업계는 만약 내 꿈이 깨져도 임종할 때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넘어갈만큼 좋은 곳일까? 그게 의문이었기 때문에 성실하게 사회인이 되는 길도 제 인생에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바나 우테나는 그 때까지 소설 일변도였던 내게, 이쪽 세계에서 뼈를 묻어도 좋다. 뼈를 묻는다면 그것도 행복이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다행히 나를 자극한 타케우치가 '협력할테니깐 게임 만들자'라고 말해준 덕분에 뼈를 묻지 않고 먹고 살수 있게 됐습니다만."

Q.이쿠하라 작품이 직접적으로 나스 씨 작품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까요? 마토 사쿠라나 코하쿠의 일종의 섬뜩함은 안시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나스 키노코 "사쿠라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코하쿠의 웃는 얼굴이 가장 무섭다는 부분은 우테나 쇼크 다음에 만든 것이니 영향이 있을 겁니다. 캐릭터 조형은 예풍이 너무 달라서 영향이 그리 크진 않지만 미술 측면은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죠. 배경에도 이야기성이 있어요."

"제가 작품을 내는 비주얼 노벨이라는 매체는 기본 종이 연극이라구요. 글자와 한장의 그림만으로 얼마나 유저의 마음을 붙잡느냐가 관건. 그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르는 건 우테나 후반의 안시가 백만자루의 증오의 검에 찔리는 장면. 흑과 적의 단색으로 연출한다는 누구나 하는 기법인데도 압도적으로 센스가 달라요."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아트를 목표로 추구하자. 보는 사람의 마음에 남는 것을 만들자는 마음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쟁이는 마음 한켠으로 그림의 힘을 믿지 않으니까 소설을 쓰죠. 애니메이터나 감독은 문학의 힘을 믿지 않으니까 영상으로 표현합니다. 기본적으로 절대 공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테나는 참고로 삼을 게 너무 많았어요."

"Fate/EXTRA CCC의 테마는 여자는 마물. 정념의 수준을 더 끌어올린 RPG를 만들고 싶었죠. 다크핑크,고딕,레트로하지만 페티시를 배경미술의 핵심으로 삼은 건 우테나의 오마쥬랄지 리스펙트입니다."

Q.그런 한편 영상화 된 공의 경계나 페이트는 리얼에 가까운 배경이라는 인상이 강한데요.

나스 키노코 "맞아요. 아름답지만 들어가서는 안 되는 분위기의 추상화된 배경미술이 더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저말고는 다들 '그거는 나스 씨 예풍이랑 안 맞아요'라고 NG를 내거든요.(웃음)"

"세상에 내놓은 이상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고, 독자의 것이기도 한지라, 세상의 독자 전원이 '리얼풍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영상화를 할 때의 정답일 겁니다. 제가 소설가라면 모든 책임은 나한테 돌아오니까 내 취향대로 해도 되죠. 오직 단 한사람의 독자를 위해서만 써도 되고, 안 팔리더라도 1년간 우마이봉만 먹으면 됩니다.(웃음)"

"하지만 내가 만드는 건 게임. 내 각본에 15명의 스탭이 함께하고, 실패하면 책임은 나만 짊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탭의 의견도 듣고, 보다 폭넓게 받아들여질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사람의 인간이 지닌 비주얼 이미지나 테마나 에고는 다섯명이라면 공유할 수는 있어요. 10명도 가능할 게예요. 하지만 30명과 통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약간의 타협을 섞어가며 30명이서 이미지를 공통시켜 작품을 만들면 어디서 본 것 같은 작품이 되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여기서 등장하는 게 이쿠하라 작품입니다. 뭐야 이 인간의 작품, 언제나 온리원인데!? 아마 이건 이쿠하라 씨가 모든 걸 컨트롤하고 있어서 미학이나 사상을 스탭한테 공유시켰으니까. 터무니없는 마법, 마왕과 같은 능력입니다. 일전에 연이 닿아 이쿠하라 씨를 만나 뵌 적이 있어요."

"어떻게 그 이미지를 공유시키는 건가요!?라고 물었는데 아니, 가능한 일이라구?라고 답하더군요(웃음) 이쿠하라 씨의 대단한 점은 비주얼이나 테마의 아름다움, 캐릭터의 강렬함은 당연한 거고, 이걸 일관되게 스탭 전원한테 입력시키고 출력하는 감독력입니다."

"아마도 이 제작에 내 모든걸 건다며 스스로를 태워가면서 싸우는 게 안노 히데아키 씨고,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백조와 같은 통치가 이쿠하라 씨 아닐까요? 당사자가 제일 많이 피를 흘려가며 상처입으니까 주변 사람도 우리도 함께할 수밖에 없어. 안 그러면 안노 씨가 쓰러지고 마는걸 하는 게 안노 씨. 이쿠하라 씨는 아마도 대극으로 물밑에서는 고통받고 있어도 스탭한테는 결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아름다운 황제의 자태를 무너트리지 않죠."

(중략)

"이쿠하라 씨나 안노 씨 같은 선배분들은 일종의 강렬한 자아가 있고, 스탭 전원을 조종해요. 그렇게 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좋은 작품이 된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지만, 엄청 체력이 드는 일이고 그런 승부의 기회는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잖아요? 그런데 선배들은 그걸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있어요.(웃음) 같은 직종은 아니라서, 같은 전장에 설 일은 없지만 나스 키노코 안에서 성역이라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정말 좋아하지만 다가가면 녹아버렷.

Q.2016년에는 신 고지라가 개봉됐습니다. 학생시절 영향을 받은 창작자가 대승부를 벌이는 모습은 힘이 되셨나요?

나스 키노코 "됐죠. 다 보고나선 의미도 없이 집까지 뛰어가고 싶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이나 집중력이 쇠퇴하죠. 옛날에는 6시간 쉬지않고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3시간이면 집중력이 끊겨버려요. 생산능력이 떨어져가는 게 아닐까 늘상 불안합니다. 하지만 10년 이상되는 선배들이 만든 근사한 작품은 '앞으로 10년은 더 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되어줍니다."

Q.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쿠하라 감독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있다면요?

나스 키노코 "니가 석유왕이라면 이쿠하라 감독한테 뭘 만들게 할꺼냐?는 질문이군요. 으음...인간관계의 질척질척함과 엇갈림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걸 선보인다는 게 가장 좋기 때문에 일단 인간 드라마. 그리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80년대 레트로 퓨처 SF도 보고 싶네요. 그리고 세라문 시절의 이쿠하라 감독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보는 것만으로 눈호강이 되는 진부한 엔터테인먼트도. 기존의 작품의 틀을 깨주었으면 한다는 의미에서는 멋진 시대극도 괜찮겠네요."

"하지만 내가 생각도 못했던 걸 꺼내드는 게 이쿠하라 감독. 만들어주신 걸 뭐든 가리지 않고 먹겠습니다. 이쿠하라 씨는 '앞으로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자 하는 사랑스러운 바보들에게 있어 일등성입니다. 언제까지고"

덧글

  • 아울베어 2017/08/13 16:31 # 답글

    번역 감사드립니다. 뭐랄까 그 당시를 지나쳐온 사람들, 특히 창작자들에게는 아직까지도 흉터자국이 선명한 상처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네요. 영향이니 충격이니 하는 말로는 부족한, 훨씬 날카롭고 무자비한 것이 깊숙하게 들어온 느낌이랄지. 나스는 당대의, 또 동시기의 창작자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선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란 인상이 있긴 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말 특별했다고 자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게 묻어나온 인터뷰였던 것 같은 느낌이네요.
  • ㅍㅊㅁㅅ 2017/08/13 17:49 # 삭제 답글

    최종화는 모든 게 아름다워서 지금도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다가 엉엉 울었습니다.

    전 왜 이 문구만 머리에 남을가요...
  • 더스크 2017/08/13 19:08 # 답글

    추상 미술을 배경에 집어넣고 싶었던거냐... 무슨 페이트를 만들려고...
  • Scarlett 2017/08/14 13:35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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