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화자를 신뢰하는 것의 함정- 감상


씹덕 담론의 갈래라고 해봐야 누가 더 쎈가를 판가름하는 vs놀이, 자기 지지캐를 찬양하고 다른 히로인을 까내리는 훌리짓, 왜 xx루트/엔딩이 아니죠?하는 인정투정 세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의 팬덤은 조금 독특하다. 이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진실을 짜맞추는 경전의 해석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10년 후에도 짜장vs짬뽕, 부먹vs찍먹, 레이vs아스카로 싸울 것이다.

이를테면 유키노시타 하루노가 동생인 유키노를 괴롭히는 것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가는 아주 중요한 쟁점이 된다. 그녀의 행동원리가 그저 따라쟁이 여동생이 눈에 거슬려 건드리고 보는 악의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목적으로 동생이 향상심을 가지고서 성장할 수 있도록 고의로 위악자이고자 하는 것인지 둘 중 어느 한쪽의 가설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경전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덤불 속과 같은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파헤쳐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논리를 완성시키는 작업은 작품의 화자 히키가야 하치만의 그것이다. 나는 히키가야 하치만이라는 필터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 내에서는 밝혀지지 않는 영역까지 직접 풀어보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게 이 작품이 가진 묘미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딱히 이 작품만의 고유한 성과는 아니겠지만, 오타컬쳐는 기본적으로 친절함이 베이스에 깔려있으니 충분히 괄목할만한 특징이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히키가야 하치만을 맹신할수록 통수를 맞게 되는 구성은 흥미롭다. 물론 하치만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유이를 추궁하는 미우라를 막지 못했고, 사가미팸이나 오리모토 카오리가 자신을 스캔할 때의 찌질이를 깔보는 특유의 시선을 뒤집을만한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진실을 규명하는 도구라는 측면의 하치만은 유키노시타 유키노나 하야마 하야토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우수했다. 

카와사키 사키가 왜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독립하고 싶다니까 덜컥 고급 맨션을 마련해주고, 통학을 위한 리무진 기사까지 제공받는 환경에서 산 그녀로서는 돈이 필요해 여가시간과 임금을 트레이드 오프하는 삶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니까. 의뢰랍시고 찾아와선 호모호모한 개드립이나 날려댄 에비나 히나의 의중에는 오로지 히키가야 하치만을 향해서만 발신하는 구조 신호가 있었다.

이렇듯 마음의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대부분의 국면에서 하치만이 비교우위를 차지했는데, 그래서 독자들은 무심결에 하치만을 신뢰하고 또한 관점을 공유하는 한편, 그 때문에 인식이 좁아지고 다른 가능성은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자 그럼 이제 드디어 본제인 학생회장 선거편이다. 타임라인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1)에비나 히나의 의뢰를 거짓고백으로 해결한 이후 서로 불편해진 봉사부 2)여기에 잇시키 이로하를 완곡한 형태로 학생회장 선거에서 낙마시켜달라는 의뢰를 하는 시로메구리 메구리 3)자기희생을 반복하는 하치만의 방법론을 부정하고 독자전선을 선언한 유키노 4)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하야마 하야토를 후보로 내세운다는 유키노의 플랜에 또 남한테 다 떠맡긴다고 비아냥을 날리는 하루노 5)이에 발끈해서 직접 학생회장에 출마하고자 결심한 유키노 6)유키노가 학생회장이 되면 봉사부는 유야무야 활동을 접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위기 직면의 흐름이다.

유키노의 희생으로 의뢰를 완수할 수는 있어도, 그 방법이면 봉사부는 사라지게 된다. 이걸 참을 수 없었던 하치만은 잇시키 이로하를 원만하게 낙선시켜야 한다는 대전제를 뒤집어, 이로하는 당연하고 전교생이 납득할 수 있는 모양새로 그녀를 당선시키는 길을 택했다. 봉사부를 지켜냈으니 이제 서로 화해하는 일만 남았나 싶었으나 이게 웬 걸,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일말의 불안감을 품은 하치만을 향해 시로메구리 메구리가 내리는 선고는 잔혹하다. 사실은 유키노가 학생회장이 되고, 유이나 하치만은 유키노를 보좌하는 형태로 임원이 되고 졸업한 자신은 이따금 놀러오는 그런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는 그녀의 고백에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치만이 가진 인식의 틀을 걷어차버리고, 그 한계와 실패를 지적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메구리의 고백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유키노와 유이가 소중하고 셋이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면 굳이 봉사부라는 형식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비판으로 기능하고 있다. 꼭 이로하를 낙선시킬 필요는 없잖아?라는 말장난이 성립한다면 유키노가 학생회장 된다고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라는 유연한 대처도 가능했을텐데, 섣불리 그 가능성을 하치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독자들도 포기해버렸다. 하치만이 너무나 뛰어난 해석툴이었기 때문에 독자도 맹점을 찔리게 되는 것이다.

화자와의 공감이나 감정이입, 동일시로 인해 놓치게 되는 시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그렇다는...

한줄요약-윾령이랑 사귀면 윾이가 슬프고 윾이랑 사귀면 윾령이가 슬프다면 그냥 처첩동금 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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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트롤메구리 2015/12/25 13:41 # 삭제 답글

    과연 내청춘 최대의 트롤러 시로메구리 메구리. 유키노가 학생회장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치만과 독자들이 착각하게 만드는 희대의 트롤러. 저런 트롤러는 학생회장 같이 사람을 이끄는 자리에 올라가면 안됩니다.
  • 의지있는 크릴새우 2015/12/25 13:53 #

    니 존재가 트롤이야! (철썩)
  • 조욱하 2015/12/25 14:36 # 답글

    유키노는 유이랑 사귀면서 하치만이랑 양다리 걸치고, 유이도 유키노랑 사귀면서 하치만이랑 양다리 걸치는 정삼각관계를 지지합니다.
  • ReiCirculation 2015/12/25 16:39 # 답글

    막짤 현웃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사실 저는 검은 레이스랑 JS 지지파라...ㅎㅎㅎ
  • ViceRoy 2015/12/25 18:31 # 답글

    처첩동금하는 동인지가 있으니 그걸로 정신승리하면 됩니다. 가만, 그거 막판에는 카와뭐시기 양도... 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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