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추방의 연출 메모 1/4 애니


<낙원추방 -Expelled from Pardise->란 제목의 극장용 3DCG 애니메이션에 관하여 뭔가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은 이 작품이 테크니컬한 부분만 주목받고 '왜 그 기술을 사용한 것일까?'라는 측면은 그다지 논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기술이 대단했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기술만 있다면 똑같은 것을, 똑같은 필름을 만들 수 있느냐 하면 고개를 가로 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면 기술을 쓸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명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3DCG의 기술적인 측면은 일절 다루지 않습니다. 기술을 써야만 하는 <배경>이나 <영상설계>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합니다. 그 내용은 실제로 현장의 애니메이터와 미팅을 하여 연출로써 말한 것들의 골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이 이런 설계사상을 바탕으로 각 담당자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가 <낙원추방>이란 필름이 되었다고 받아들여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담당한 부분은 C파트·S29(사이버 스페이스를 거쳐 디바로 귀환하는 장면)에서 D파트·S42(연구실 옥상에서 날아가는 HLV를 올려다보는 안젤라와 딩고)까지로, 제가 짠 초고를 감독님이 몇 컷 손을 보는 과정을 거쳐서 완성 콘티가 되었습니다. 수정이 된 장면은 안젤라를 디바로 보낸 다음 딩고와 프론티어 세터가 대화하는 C파트·S31에서, 직전 신에 맞춰 안젤라를 눕혀둔 묘사가 추가된 것과, 거기에 맞춰 D파트·S34에서 윈도우 표시창에 표시된 안젤라의 표현 두개 뿐입니다.


그림 콘티 작업에 들어가는 단계에서 미확정인 설정이 다수 존재했는데요, 그 이유는 본작이 3DCG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설정화에서 3D모델을 만드는 경우 세세한 수정이 되는 것이 확실한데, 그런 까닭에 러프와 클린업의 중간 정도 되는 퀄리티의 설정화로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점이 구체적인 화면 만들기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소 애를 먹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감독이나 디자이너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정형적인 워크 플로우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3DCG 작품이기에 기인하는 문제였는데,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트리키한 구조를 취하지 않고, 철저하게 고전적인 구성을 의식한 그림 콘티>를 짤 것을 목표로 하게 된 최대의 요인으로도 작용하였습니다.

이 <고전적 구성>이란 생각은 처한 상황에서 도출한 것만이 아니라, 마침 본작의 그림 콘티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어느 3DCG 애니메이터의 blog에서 <3DCG 연출에 셀애니메이션 연출가는 필요 없음.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기사를 본 참이었고, 뭐 그 말대로 3DCG에 대해서 변변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전적 구성>을 선택한 최대의 이유는 우로부치 씨의 각본이 그런 구성이었던 점도 컸습니다.

그림 콘티를 짜기 앞서 각본의 구조를 분석한 결과, 영상면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고 판단, 그 흐름을 지켜가면서 큰 흐름을 만들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1)디바로의 귀환
2)디바에서 탈출
3)시가전에서 시작해 HLV 발사


1)디바로의 귀환

제가 담당한 파트에 국한시키자면, 각본의 구조상 그 기점(마일스톤)에 해당하는 것은 이미 주인공 안젤라가 여로에 오른 디바가 아니라, 프론티어 세터가 존재하는 <연구시설>입니다. 

그 말은 즉 영상의 구조를

연구시설(기점)→디바(행선지)

의 장면 흐름을 축으로 삼아 구축하게 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영상의 구성 방식(콘티 작성법이라고도 합니다만)은 흔히 말하는 <카미테/上手> <시모테/下手>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이번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탠다드를 따라서 화면 오른쪽을 카미테, 화면 왼쪽을 시모테로 삼는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이건 이미 작업이 진행된 감독 파트에서 취한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대의 오른쪽을 카미테, 무대의 왼쪽을 시모테로 구분함.


이 장면에서 시모테 쪽에 연구소를 배치한 이유는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안젤라가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 그녀가 디바로 <귀환했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또 이 이후에 안젤라가 디바에서 탈출하는 대목에서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탈출했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 이론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데요,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님이 집필한 <영상의 원칙>이란 제목의 책이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선으로 유효할지도 모르겠어요. 어디까지 보조선이라 생각하고 읽어보면 아주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우 뿐만이 아니라, 본작품은 <지상>과 <우주>라는 장소의 종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도 디바(고관들)는 높은 곳에 있어서 올려다 보는 형태로, 지구는 낮은 곳에 있어서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도록, 화면을 구성하는걸 의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처럼 전체적인 인상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보이지 않는 경사>가 존재하는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이 점은 이 다음 파트인 디바에서 탈출하기 파트까지 적용시켰습니다. 어디까지나 <기본>으로, 안젤라가 고관들 앞에 있는 장면에서는 이 법칙을 어기기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게 지킨 것은 아닙니다.

고관들 앞에 선 안젤라 신에서 의식한 점은 카메라를 고관들 배후로는 절대 두지 않을 것, 그리고 안젤라 주위를 카메라가 회전하여 <방향성을 흐트러트릴 것>이었습니다.

이 고관들이 있는 장소는 주인공 안젤라한테 있어 <가장 먼 장소>이자 <서로 섞일 수 없는 장소와의 경계선>이란 사실을 제시해야 하는 무대입니다. 또 벽처럼 거대하게 솟아오른 고관들은 안젤라 입장에서 장벽 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라서, 실제로 지금 가진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건 디자인 면에서도 안젤라가 서있는 무대가 <새장>을 모티브로 한 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레이아웃 면에서, 안젤라가 찍히는 컷은 기본적으로 <새장>을 본딴 <기둥>이 프레임에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또 동시에 고관들의 권력이 강대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능한 그들의 등을 보이지 않는 컷배분을 의식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등을 보이지 않는다=배후를 잡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컷을 만든 이유는, 이런 이야기상의 상황을 (연출 의도도 포함해) 제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흔들리는 카메라를 좇으려 하는 안젤라의 동작을 만들어,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 그녀 안에서 조바심이 생겨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이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카메라 워크가 시작되기 전에는 팬 포커스(초점이 전부 맞음)였는데, 카메라 워크가 시작되면서 안젤라를 업하게 됨에 따라 피사계심도가 옅어져서 핀트가 오직 그녀한테만 맞춰진다...는 영상도 콘티 단계에서 지시했습니다.

<핀트가 오직 그녀한테만 맞춰진다>는 점은 그녀의 고립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사고·지향이 경직되어 있어, 주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구속되는 안젤라는, 디지털에 관한 콘티맨의 빈곤한 상상력이 드러난 것 같기도 합니다. "압축이니까 상자에 가두는 건 어떨까..."같은 소리를 해가며 그렸는데요, 결과적으로 이 이후의 고속통신 게이트 안에서의 <상자 안젤라>를 떠올리는 밑거름이 됐으니 결과 올라잇으로 치렵니다.


무대는 바뀌어 프론티어 세터가 있는 연구실로 돌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이 일련의 시퀀스에서는 프론티어 세터와 딩고를 마주보게 하는 레이아웃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시사하기 위한 것인데, 여기서는 구태여 신의 전반부에서는 딩고의 시선·자세를 프론티어 세터한테 향하지 않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딩고가 프론티어 세터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는걸로 보이지는 않을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실은 정반대로 "구태여" 공식을 지키지 않은 겁니다. 이 장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딩고는 <이 별에서 살아갈 것>을 이미 선택한 존재라서, 이 별에서 나가고자 하는 프론티어 세터한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 되는 캐릭터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거리를 두어야 하겠지만, 음악이 그 경계를 불식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계속 연주를 하는 것에 집중하여, 감정이입에 저항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이 장면에 담아내어 표현했습니다.

한편 프론티어 세터는 그가 A.I.를 탑재했다고는 하나 무기질의 로봇이란 사실을 거꾸로 이용했습니다. 로봇은 세세한 동작을 표현하는 게 힘들고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움직임도 단조로워집니다. 하지만 그같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다>는 요소는 역설적으로 <올곧다>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나타내는 묘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프론티어 세터는 기본적으로 시선을 딩고한테 향한다·돌린다는 동작만 취합니다. 그건 그의 실직함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전반부의 감독 파트와 비교해서 프론티어 세터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줄어든 이유는 그같은 연출상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두 사람의 의식이 변하는 것이 안젤라가 포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목부터인데요, 그 시점에서 딩고가 일어서 프론티어 세터보다 눈높이가 높아지고, 정면으로 서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후의 시퀀스에서 모든 행동의 규범이 되는 게 딩고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격이 성격이니까요, 그저 니힐하고 멋진 표정으로 <인의>라는 대사를 치면서 장면을 마무리 지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뭔가 어긋난 액션>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수도였습니다.

이어지는 안젤라가 포박되어 있는 압축영역의 신은 감독님이 주신 이미지 보드가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거기에 따라 영상을 짰습니다. <차가운 공간>이라는 지시였는데, 숲 속이라는 비주얼도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차가운 이미지는 되지 않겠군 생각했지만, 무기질적인 콘크리트 공간으로 설정하지 않은 대목에서 감독님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프론티어 세터가 정보로 등장합니다. 안젤라가 프론티어 세터의 구체에 휩싸여 탈출하는 것은 이미지 보드에 있었지만, 그저 빛나는 구체가 나와서야 설정은 맞더라도 캐릭터적으로 부족하다고 판단, 구체 중심에 블록화한 프론티어 세터의 모자를 띄웠습니다. 이로써 단순한 이펙트가 아니라 캐릭터로서의 구체를 도출한 것 같습니다. 이게 저 개인적으로는 결정타였고, 이후에도, 구체에서 팔이 나오거나, 최종적으로는 송별하는 안젤라도 <인의>의 동작을 취하는 시퀀스를 짜내는 등 총체적인 비전의 흐름이 완성됐습니다.




또 하나 이 장면에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안젤라의 얼굴 무너트리기입니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 콘티는 3DCG란 점을 딱히 의식한 것이 아닙니다. 3DCG이건 아니건 간에 관객은 안젤라로 대표되는 캐릭터나 아한 같은 메카닉의 액션 엔터테인먼트를 보러온 것이지, CG의 데몬스트레이션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필요한 연기이자, 동시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표현의 형식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걸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힘드니까 도리어 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합니다. 뭐 셀애니메이션의 경험상, 이런 뿜는 그림은 아무리 공을 기울이건 3장이면 충분한 일이라서 만약 3DCG로 불가능하더라도, 셀을 씌워 처리하면 예산적으로 문제 없겠거니 하는 이성적인 판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연출 플랜으로 이 얼굴 무너트리기가 필요했을까요? 그건 그녀가 굳게 정신무장한 에이전트에서 평범한 소녀(?)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생길 걸 감안하고 하는 말인데요, 디자인은 둘째치고 전반부의 안젤라는 쿠사나기 모토코를 원류로 하는 미인 사이버 에이전트의 아류로 묘사되었습니다. 

그같은 쿠사나기 모토코적 존재가 신체성을 획득하여 물질세계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과연 현대적인지 어떤지 하는 문제는 덮어두고서, 신체성의 획득이란 테마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표현방법의 틀을 뛰어넘는다>는 방법을 취할 필요가 이번에는 있었습니다. 

CGCG로 이루어진 신체묘사를 벗어던지고 과거에서부터 있어왔던 셀룩 표현을 선보이는 것은, 까딱하면 퇴행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퇴행으로 보이는 것을 과연 정말로 퇴행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번 작품의 커다란 테마와도 합치하는 것이니까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리어 뭉개는 표현을 해봤습니다.

물론 콘티를 그리는데 몹시 중요한 <기세>였다는 점도 부정은 안 합니다. 여담이지만 때때로 저는 이처럼 캐릭터가 뿜는 연기를 만드는데요, 그같은 묘사의 콘티 지시를 하는 방식은 오카무라 텐사이 씨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카무라 씨는 "(내 영향이) 그거냐고!"라고 할 것 같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진행하여 정합성을 취하면서도, 필름의 기세를 내기 위한 밑그림을 완성시켰습니다. 
자 그럼 고대한 디바에서 탈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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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7/27 00: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의지있는 크릴새우 2015/07/27 00:49 # 답글

    http://maidsuki.egloos.com/4161526 낙원추방 -Expelled from Paradise- 우로부치 겐 인터뷰
  • 아인베르츠 2015/07/27 05:04 # 답글

    안젤라가 압축되는 장면보면서 떠올렸던게 fate extra ccc에서 얼터에고의 크래쉬&트래쉬를 통한 데이터 압축. 이쪽은 자동인데 비해 저쪽은 손으로 자그맣게 하지만 어쨌든 네모난 큐브형태의 최저 용량으로 압축해준다. 이후에 안쓰는 구역에 유폐시키는 것까지 비슷하다(...) 프론티어 세터가 안젤라를 찾아가는 장면이 S.G 돌파후 심상풍경에 들어가는 장면처럼 보이는 것까지 그렇고 이건 그냥 내가 억지 해석하는건가.... ccc 발매는 13년 3월, 낙원추방 개봉일은 14년 11월. 하필 각본가가 우로부치라 그런지 도저히 우연은 아닌거 같고(...) 감독인 미즈시마는 노골적인 sf 덕후인지라 더블오때나 UNGO 때 생각해보면 분명 둘 중 한명이 범인인데 이거 누구 생각이야 대체?
  • 착선 2015/07/27 15:11 # 답글

    흥미로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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