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오펜-장래의 꿈 1/2 라노베

아자리라는 마술사가 어떤 인간이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탑> 안에는.

그만큼 그녀의 이름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천마의 마녀. 대륙 최고봉 마술사 양성기관 <송곳니 탑> 내에서도 굴지의 마술사. 차일드맨 교실의 역분사식 폭발 아가씨. 대답이 궁해서 말을 흐리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는 그녀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악평, 혹은 푸념을 억누르고자 함이 분명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말을 내뱉으면 따라올 그녀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즉 다시 말해서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남동생 격인 킬리란셰로는 이때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익숙했던 것이다. 그녀가 <탑>의 보관고에서 봉인된 천인종족의 유산을 멋대로 가져오는 일쯤은.

"어 있었구나 킬리란셰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자리는 쾌활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어깻죽지를 간질이는 흑발에 장난을 좋아하는 고양이를 방불케 하는 쌍모. <탑>의 상급 마술사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로브를 몸에 걸친 장신의 여성이었다. 지금은 겨드랑이에 정밀하게 세공된 거울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한눈에 그 거울의 장식이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술문자. 윌드 드래곤=노르닐이 쓴 침묵마술의 매개체다. 

".....하지마"

눈을 빛내며 말하는 아자리를 향해 얼추 전모를 헤아린 킬리란셰로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러자 아자리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랬지 참. 미안. 그럼 물어봐도 될까? 무슨 볼일 있어? 가능하면 <천인> <유산> <실험>을 제외한 단어로 답해주면 좋겠어."

"<아니> <싫어> <거절할래>를 제외한 말로 답해준다면 그럴게."

"....."

생글생글 대답한 아자리를 향해 킬리란셰로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곤하나 킬리란셰로도 이런 말로 아자리를 막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천재지변을 거슬러봤자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책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공범>과 <휘말려든 일반 학생>은 책임이 완전히 달라질테니.

"....으음 실은 나 지금부터 할 일이"

그러나, 킬리란셰로가 어떻게 아자리를 자극하지 않고 책임을 피할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아자리가, 어딘지 연기조로 교태를 부렸다.

"....알겠어. 아쉽지만 킬리란셰로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

"이건 관두고 대신 존재의 감산(存在の引き算. 인간이 보기에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강대한 마력을 얻게 되는 초고도 백마술.)이랑 발트안데르스의 검 콤보를 시험해볼게. 먼저 킬리란셰로가 거북이 똥이 될 때까지 존재를 감산시킨다? 그다음에 내가 그걸 베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 다음, 다시 감산과 되돌리기를 반복해서"

"와 어떤 유산을 찾아낸거야? 기대된다."

킬리란셰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자리의 말문을 막듯 소리쳤다.

선택지를 강요받게 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공범관계를 만들게 됐지만 어쩔 수 없다. 발트안데르스의 검이 뭔지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악명높은 휴키오에라 왕자의 비법과 함께 거론된 물건이 제대로된 것일리가 없었다.

"그렇지. 미지에 도전하는 자세야말로 학생의 본분이지. 킬리란셰로가 학구파라 나도 기뻐."

"...신난다..."

킬리란셰로는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들었다. 그 모습은 환희나 흥분을 나타낸다기보다는 나이프를 들이밀자 항복 자세를 취하는 패잔병을 연상케 했는데 아자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킬리란셰로를 농락한 아자리는 그대로 물흐르듯 뒤로돌아 턱하고 교실 벽에 손을 뻗었다. 구체적으로는 교실에서 나가려든 두명의 소년을 막는 것처럼.

"힉!"

"으악!"

느닷없이 차단당한 두사람은 척보기에도 어깨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쪽은 적발에 주근깨가 특징적인 소년. 다른 한쪽은 흑발을 세갈래로 따서 묶었고, 무슨 영문인지 로브 위에 백의를 걸친 소년이었다. 킬리란셰로와 같은 차일드맨 교실의 학생 하티아와 코미클론이었다. 아무래도 아자리가 킬리란셰로를 상대하고 있는 동안 달아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안심하렴? 하티아랑 코미클론도 빼먹지 않고 참가시켜줄테니까."

생글생글-어쩌면 화난 얼굴보다도 무섭다-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하티아와 코미클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 고마워."

"감사하지..."

두사람이 말하자 아자리는 기분 좋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거울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눈을 피해 하티아와 코미클론이 킬리란셰로를 노려봤다.

"....대체 뭐한거야. 킬리란셰로! 더 질질 끌어서 아자리 주의를 분산시켰어야지!"

"....맞아! 한명이 덥석 물려 있을 때 나머지 둘이 달아난다! 천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상투수단이잖아!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 얼마전에 피의 맹약을 맺었으면서!"

소리죽여 절규하는 은근히 재주좋은 행동으로 두사람이 호소했다. 하지만 킬리란셰로는 눈을 반쯤 뜨고 답했다.

"맺은 적 없어. 그 조건이면 무엇보다 제일먼저 먹잇감이 되는 내가 너무 불리하기 때문에 조문을 수정하기로 했잖아."

"이대일이야! 의회의 삼분의 이의 찬성을 얻었는데 가결되지 않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민주주의의 폭주는 이렇게 시작되는 거겠지..."

"궁시렁 궁시렁 말이 많네. 자 일로 와."

킬리란셰로가 체념한듯이 말하자 아자리가 그렇게 말했다.

살펴보자 방금전 아자리가 끼고 있던 거울이 테이블 위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매끈한 거울면이 이쪽을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는 복잡한 마술문자가 균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찍이 이 대륙에 존재했던 천인종족은 문자를 매개로 마술을 행사했다고 한다. 음성과는 달리 형태가 남는 문자를 사용했던 까닭에 천인이 대륙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지금도 그녀들이 남긴 아이템에는 마술의 힘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술문자는 완전하게 해독된 것이 아니다. 강력한, 그리고 복잡한 구성이면 일수록 그 의미를 해독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아무리 마술사일지라도 그리 쉽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탑> 최강의 마술사인 차일드맨 파우더필드 교사로부터 직접 천인종족의 유산을 다루는 법을 배운 마녀 같은 게 여기에 없는 한은 말이다.

"...그래서 이건 대체 뭐라고 써있는건데"

킬리란셰로가 묻자 아자리가 득의양양하게 가슴을 피고 답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앞을 내다본다>는 거지. 이 테두리의 문자를 위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덧그리면 마술이 발동해서 만진 자의 미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질 거야."

"거야...라니 시험해보지 않았어?"

"아이참. 그래서 여기에 들고 왔잖니."

"...."

아자리의 말에 교실에 있던 세마리의 실험동물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요행이라면 요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의 모습...이라. 상상했던 것보다는 얌전한 편인가? 나는 철썩같이 하전입자를 수속해서 절대파괴 빔을 쏘겠다는 얘기일줄 알았어."

"아니 잠깐. 써보지 않으면 모른다구. 거울에 비친 인간의 카피를 만들어서 진짜로 바꿔버리는 계통의 장치일지도 몰라."

"음 마술문자를 읽을 줄 아는 게 자기뿐이라는 걸 기회삼아 적당한 설명으로 얼버무렸을 가능성은 충분해. 테두리를 만지면 거울 안에 갇히게 될수도..."

"그런 게 취향이면 다음번에 준비해줄수도 있는데?"

이번 소곤소곤은 아자리 귀에도 들렸는 모양이다. 아자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킬리란셰로 일행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휙휙 가로 저었다.

"됐으니깐 자 킬리란셰로."

아자리가 킬리란셰로를 보면서 거울을 가리켰다. 킬리란셰로는 자동적으로 일번타자를 맡게되는 부조리를 느끼면서 거울 앞에 섰다. 매끈한 거울면에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흑발의 소년 얼굴이 비춰졌다.

...뭐 그 쌍모에 비춘 것은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달관한 기색이었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자리 지시에 따라 문자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리고 그대로 거울의 테두리를 한바퀴 덧그렸다. 그러자 테두리에 기록된 문자가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였고, 킬리란셰로의 얼굴을 비추고 있던 거울면이 돌이 던져진 수면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오옷!"

"호오..."

하티아와 코미클론이 흥미진진하게 거울을 쳐다봤다. 이들도 <탑>의 마술사. 아자리가 무허가로 들고왔다는 전제만 없었다면 천인종족의 유산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리 없었겠지. 

이윽고 거울에서 파문이 잦아들고 한사람의 인물이 비춰졌다.

지나치게 눈매가 나쁜 시커먼 남자가.

".....하?"

그 모습을 보고 킬리란셰로는 무심코 눈을 부릅떴다.
아니 킬리란셰로 뿐만이 아니다.
거울을 바라보던 하티아나 코미클론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자리의 말을 믿는다면 지금 거울에 비춰있는 남자는 킬리란셰로의 미래의 모습일 터인데...그 얼굴의 이목구비가 지금의 킬리란셰로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는 스무살 정도일까. 이 세상의 모든걸 비뚜로 보는 듯한 예리한 안광. 매리(罵詈)와 욕설, 그리고 오직 협박을 하는데만 특화된 것 같은 입언저리. 그야 흑마술사는 검은 옷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가 걸친 것은 로브가 아니라 징이 박힌 가죽 자켓과 바지였다. 가슴 언저리에 빛나는 <탑>의 문장. 검을 휘감은 드래곤 펜던트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마술사라고 생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도 마술사냐 야쿠자냐 물어본다면 근소한 차이로 후자에 힘이 실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가혹한 인생을 살면 이런 꼬라지가 되어버릴까 싶을만치 양아치 같았다.

그러나 경악과 곤혹에 사로잡힌 차일드맨 교실의 학생들 중에서 혼자 재밌다는 듯이 배를 감싸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아자리다.

"아하하하하! 완전 양아치네 킬리란셰로. 반항기치곤 너무 늦은거 아니니?"

"....아자리 이거 정말 나 맞아? 아무리 그래도 인상이 너무 다른 거 같은데..."

킬리란셰로가 땀을 흘리며 말하자 아자리는 턱에 손가락을 하나 갖다대며 답했다.

"뭐 미래는 불확정인 법이니까 100%는 아닐거야. 자칫 어긋나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그렇지 대체 누구를 닮아야 이렇게 되는 걸까. 근묵자흑이라고들 하니까 너무 나쁜 친구는 사귀지 마려무나"

"...."

그 말에 하티아랑 코미클론이 반쯤 뜬 눈으로 아자리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자리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니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하티아와 코미클론이 석연치 않은 대답을 하는 사이 거울 안에는 또 변화가 생겼다.

미래의 킬리란셰로가 성큼성큼 걷는다 싶더라니 전방에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 머리를 아무런 주저 없이 걷어차버린 것이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다음 뒤꿈치로 자근자근 짓이기더니 급기야는 마술까지 쏴버렸다.

"으악! 무슨 짓이야 킬리란셰로!"

"아니 나는 아무 짓도 안 했거든! 저녀석을 킬리란셰로라고 부르지 말아줄래?"

킬리란셰로가 비명섞인 목소리를 내자 마치 거기에 호응하듯 거울 속의 작은 체구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분명치 않은 목소리를 울려댔다.

"이자식이! 무슨 짓거리야 흑마술사! 언제나 언제나 아무 맥락도 없이 발로 차대질 않나! 이 마스마튜리아의 투견 볼카노 볼칸 님의 두뇌에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 25주년을 기념하며 죽여버린다!"

"시끄러 인마! 네놈 대가리에 1그램이라도 뇌가 들어있다면 불풀어 오를대로 부풀어 오른 사채 액수를 말해보라고!"

따위의 실랑이를 주고받다가 다시 시커먼 남자가 마술을 방출한다. 볼칸이라 이름을 댄 작은 체구의 남자가 재차 날라갔다.

"헤에~ 영상뿐만이 아니라 음성까지 나오네. 굉장하다!"

"아니 지금 그거에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태평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아자리를 향해 무심코 소리쳤다. 그러자 코미클론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크게 눈을 떴다.

"마스마튜리아...설마 지인인가!? 몸이 상식을 초월할만큼 튼튼하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래도 느닷없이 발로 차고 열충격파는 아니지...근데 사채가 어쩌니 말하지 않았어? 설마 킬리란셰로 사채업자라도 된거야...?"

하티아의 말에 이미 야쿠자 쪽에 기울어 있던 천칭이 더욱 예리한 경사를 그렸다. 킬리란셰로는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자아를 지키려는 듯 이마에 손을 대고 소리쳤다.

"....어, 어쨌든 이제 됐지? 다음 사람 다음!"

"음 그래. 대충 개요는 파악했으니까 된걸로 치자. 그럼 다음은 하티아."

"어...."

아자리한테 지명받고 하티아가 진심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왜냐면 그는 지금 킬리란셰로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한 참이니까. 가정의 미래라고는 하나, 어떤 의미로는 최대급 프라이버시다. 무엇이 비출지 모르는데 자진해서 만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자리를 거역할 수 있는가 하면 대답은 노였다. 하티아는 찰나의 시간을 거쳐 죽음보다는 수치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뭐 어떤 게 튀어나오건 그 킬리란셰로 다음이니까 두려울 거 없어."

"큭"

하티아의 자신을 타이르는 말에 킬리란셰로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되도록 비참한 미래가 비추길 기원, 아니 저주하면서 하티아가 거울의 테두리를 덧그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티아의 손가락이 모든 문자를 통과함과 동시에 거울 표면이 방금전과 같이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윽고 그것이 잠잠해지고 거기에는 한 남자가 비춰진다.

검은 망토와 복면을 쓰고 손에는 대낫을 쥐고 덤으로 거대한 황소에 걸터앉은 남자가.

"...." 
"...."
".........하아?!"

얼마간의 침묵 후 하티아의 갈라진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졌다. 하티아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 킬리란셰로의 미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의외이기도 했고, 그 낙오된 모습은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나마 '낙오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 거울 안에 비춰져 있는 남자는 그런 게 없다. 왜 복면을 쓰고 있는지도, 왜 망토를 걸치고 있는지도, 왜 대낫을 휘황찬란하게 빛내고 있는지도, 무엇 하나 거기에 이르는 필연성을 도출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소. 소다. 의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더 적을 정도였다.

"아.....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뭐야 이게!? 아니 누군데 이거!?"

"누구냐니...하티아 아닐까!?"

"아니 어디가 난데!? 알멩이를 전혀 알 수 없잖아!"

그렇게 하티아가 당황하며 소리치자 마치 이에 응답하듯 거울 안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어둠에 사는 암살자! 밤과 계약을 맺고, 낮에는 얼굴은 감추고 살아가는 공포와 악몽의 구현! 몽마의 귀족, 블랙타이거!"

소리높여 이름을 대고 척하고 포즈를 취했다. 소 위에서. 그 말을 듣고 킬리란셰로의 시선은 하티아를 향했다.

".....블랙타이거 씨라는 모양인데."

"의문이 더 깊어질 뿐이잖아!"

하티아가 표정을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물들이며 소리쳤다. 참고로 아자리는 거울에 비친 블랙타이거가 이름을 댄 걸 듣고 자지러져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킬리란셰로는 미간을 좁히고 팔짱을 꼈다. 그야 조금은 비참한 미래가 비추면 좋겠다고 생각이야 했지만 이 지경까지 되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앞으로 하티아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걸까.

코미클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거울을 바라보면서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가설 첫번째, 마술사의 길을 포기한 하티아는 유랑극단에 들어가 광대로 살아갈 것을 결의했다. 가설 두번째 훈련중 두부를 강타당한 하티아는 갑자기 전위예술의 재능에 각성해 자신을 화폭으로 삼은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가설 세번째 암살교단 <검은 사바트림>에 연인을 살해당한 하티아는 얼굴과 정체를 감추고 어둠에 도사린 암살자를 죽이는 암살자가 됐다. 싸워라 블랙타이거! 악을 벌하는 그날까지"

"...두번째려나? 세번째도 버리기 아깝지만 살해당한 연인이 좀 걸리네."

"그럼 개조수술 도중에 달아나 옛 동포였던 괴인들과 싸우는 방향으로."

"그건 괜찮아."

"멋대로 남의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만들지마!"

하티아가 비난 섞인 소리를 쳤다. 킬리란셰로는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파란만장하지 않은 인생인데 이렇게 되는 인간이 더 무섭지만."

"큭...."

킬리란셰로의 말에 하티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괴롭다는 듯이 포복절도하던 아자리가 눈에 머금은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실컷 웃었네. 그럼 다음 코미클론 가보자. 너는 대체 무슨 색깔 타이거일까."

"남을 변태 동료로 만들지 말아주겠어?!"

"너야말로 남을 변태 취급하지마!"

아자리의 말에 코미클론이 소리치고 거기에 하티아가 불만을 표시한다. 참으로 기묘한 연쇄반응이었다.

코미클론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기세로 몸을 움직이더니 호들갑스러운 몸짓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훗 이 나를 킬리란셰로나 하티아랑 똑같은 취급하면 곤란하지. 유일하게 걱정거리가 있다면 머지않아 천재 과학자로 대륙에 이름을 떨칠 이 나를 집행부가 지금부터 위험시할 것 정도일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래."

"만지고 싶지 않아요. 한번만 봐주세요. 아니겠어"

"낙오자와 변태는 닥치고 있어주겠나!"

어깨를 움츠리며 킬리란셰로와 하티아의 말을 가로막듯 코미클론이 절규했다. 하지만 그 갈라진 목소리가 킬리란셰로와 하티아의 지적을 증명해주는 꼴이었다.

"그래그래.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해"

"크...윽 후회하지 말라구!"

코미클론은 깨끗히 체념하지 못하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거울의 테두리를 덧그렸다. 

거울이 파문을 일으키고 이윽고 다시 매끄러워졌다.

그러나.

"....음?"

질끈 두 눈을 감고 있던 코미클론이 실눈을 뜨고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게 거울 안에는 검은 어둠이 망양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지 그 누구의 보습도 비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대체."

"설마 고장났나?"

킬리란셰로와 하티아는 코미클론 어깨 너머로 거울을 살펴봤다.

천인종족의 유산은 강력한 마술이 깃들어 있지만 새겨진 문자의 퀄리티에 따라서 일정 회수를 사용하면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도 존재한다. 킬리란셰로와 하티아가 먼저 사용하기도 했으니 한계를 넘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거울의 테두리를 지긋이 살핀 아자리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자의 열화는 보이지 않아. 적어도 기능을 잃은 건 아닐거야."

"그럼 왜 비추지 않는데? 아 어쩌면 검은 복면과 검은 망토 차림에 낫을 들고 소에 올라탄 코미클론의 등을 너무 가깝게 잡아서 검은색만 비추는건가?"

"동료를 늘리지마! 그딴 게 둘이나 있을거 같아!"

"그럼 대체..."

킬리란셰로가 턱을 쓰다듬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코미클론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뭔데, 뭐 알아냈어?"

하티아의 물음에 코티아는 과장되게 끄덕이고 팔짱을 낀다음 의장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천인종족의 유산이라고 한들 만능은 아니다! 제아무리 침묵마술이라도 이 천재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지! 핫하하하!"

그렇게 말하고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러나

"너 혹시 죽은 거 아닐까?"

거울을 요리조리 살펴본 아자리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네?"

얼마간의 침묵 후, 코미클론이 가는 목소리를 냈다.

방금전과는 정반대로 조용해진 코미클론이 녹이 슨 태엽 장난감같은 거동으로 킬리란셰로와 하티아를 바라본다. 킬리란셰로와 하티아는 일순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애써 허무럼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신경쓰지마 코미클론. 결국 가능성의 이야기라고 아자리가 말했잖아. 근데 목 안 말라? 뭐 사다줄까?"

"그래 맞아 코미클론. 나랑 킬리란셰로 미래도 엉망이었잖니. 아마 천인의 개그 장난감 같은 거겠지. 근데 뭐 하고 싶은 일 없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할게."

"갑자기 다정하게 대하지마아아아아아아!"

우주보다 먼 곳 감상 감상


옛날 여고생들은 중간고사 빡공하고 운동회 계주 하는 것 정도가 내 생애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고 그거면 이야기로 만들어지기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 여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밴드도 하고 산도 타고 아이돌 활동도 모잘라 급기야 남극까지 가야 그림이 되니 치열한 특성화 시대의 슬픈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남극에서 실종된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 남극탐험을 하는 게 일생의 목표인 소녀가 알바로 모은 백만엔을 잃어버리고 화장실에서 질질짜는 인생극장으로 출발해서 마냥 진지빠는 작품일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페이스를 유지하는 완급조절이 절묘하다. 이 쿠소게 같은 현실의 그림자가 도처에 깔려있음에도 그런 꾸리꾸리함을 희석시켜주는 드립감 덕분에 종종 근심걱정 없는 키라라계 모에 애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말박 애니가 위닝 라이브만 없으면 완벽한 애니인 것처럼 '그' 아이돌물에서 진정 걷어내야 할 것은 화전 선생이 아니라 깡통 빻리디 재롱잔치였던 것이다.

소재,디테일,영상 면에서 같은 분기에 방영된 유루캠과 비등비등하지만, 온갖 예쁜 감정들만 담아내기 마련인 이 바닥의 철칙을 무시하고 인간의 추잡한 일면을 끄집어낸 점이 이채로움을 발한다. 타카하시 메구미는 (유루캠의 사이토 에나와 다르게)변화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을 그저 응원해주는 좋은 이해자로 머물지 않는다. 내심 자기보다 아래라고 얕잡아본 소꿉친구가 새친구를 사귀고 무언가에 열의를 갖고 도전하자, 괜시리 소외감이 들고 조바심이 나서 몰래 훼방을 놓는 옹졸함이라니!

육상부 시절 친구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도 의외로 도량이 작다고 자조하면서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넘겨야 하는 어른의 처세를 선택한 히나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 말로 한 때 친구였던 사람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찰나, 편하게 속죄할 생각일랑 접고 평생 타인을 상처입힌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라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히나타의 대변인이 되어준 시라세.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 애니메이션이 달리 또 있을까. 무엇보다 용서받길 원하는 사람은 양반이고 남을 아프게 만들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별일 없이 사는 사람도 가득하다는 게 현실의 가혹함이겠지만.

우주보다 먼 곳-하나다 쥿키 인터뷰 애니

Q.하나다 씨는 <요리모이> 기획부터 참여하셨다는 모양인데 어떤 흐름으로 제작에 참가하셨습니까

<노게임 노라이프> 제작에 단락이 지어졌을 무렵이었을까요? 타나카 쇼 프로듀서가 '다음엔 이시즈카 아츠코 감독이랑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어보지 않을래요?'라고 권유해주셨는데 그게 계기입니다. '소녀가 주인공' '살짝 SF가 가미된 작품' 등의 핵심 요소를 말씀해주셨는데 그 시점에서의 내용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타나카 프로듀서나 이시즈카 감독과 함께 SF물 기획을 몇갠가 짜서 내용을 채워봤어요. 개중에는 3화 정도까지 각본을 쓴 타임리프물도 있어요.

Q.그정도까지 내용을 굳힌 아이디어도 있었군요.

맞아요. 다만 이시즈카 감독이 '오리지널 작품이니까 하나다 씨가 흥에 겨워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지적해서 눈이 뜨였어요. 듣고보니 나부터가 즐겁게 쓰지는 않았구나 싶었거든요. 타임리프물 시나리오는 일단 큰틀과 결말을 굳힌 다음에 머리에서 끝까지의 흐름을 채워넣는, 말하자면 퍼즐 같은 작업이에요. 설계도를 따라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을 그 시점의 나는 즐기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보다는 기껏 오리지널 작품이니까 '이 얘기 다음은 어떤 전개를 쓰면 재밌으려나'하고 매화, 미개척지를 헤쳐나가는 식으로 쓸 수 있는 소재가 낫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기획을 일단 백지로 돌리자는 말이 나와서, 처음부터 다시 다듬게 됐습니다.

Q.여고생들의 남극기행이라는 테마로는 어떻게 도달하게 됐나요

이것저것 아이디어가 나오고 사라지고, 도중에 영화 <노게임 노라이프 제로> 제작을 하기도 하면서 이시즈카 감독이 '남극을 그리고 싶다. 오로라를 애니로 그려보고 싶다'고 제안을 해주셨죠. 저도 여행은 그리고 싶은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럼 남극까지 가서 마지막에 오로라를 보는 여행 얘기로 만들고 싶어요.'라는 모양새로 결정됐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소녀가 주인공이란 점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소녀가 여행을 하여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커다란 달성감을 느낄 수 있을만한 그런 이야기로 만들자고 생각했죠. 저도 로드무비를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거라면 흥겹게 쓸 수 있을거라고 봤어요.

Q.이야기의 주축을 담당하는 네명의 여고생은 어떤 캐릭터로 배치하셨나요?

처음에 주인공으로 만든 건 '엄마가 남극 관측대 활동 중에 행방불명이 됐고, 본인도 남극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소녀' 즉 시라세였습니다. 당초 설정으로는 밝고 기운찬 캐릭터였는데 '행방불명이 된 엄마'라는 설정은 주축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웠어요. 그리고 싶은 건 소녀들의 유대감이나 우정인데 무거운 설정에 이끌려 시라세와 엄마의 이야기가 메인이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래서 폐기하려고 했어요. 그 순간 이시즈카 감독이 '얘는 캐릭터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니까, 예를 들어 주인공 옆에 있을 만한 캐릭터라면 틀림없이 캐릭터가 살거다'라고 말씀해주셔서 시라세 설정은 남겨둔 상태로 주인공을 새로 정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키마리입니다. 실은 키마리는 반쯤 구상했다 사라진 SF기획의 주인공이었는데 재밌는 캐릭터라서 재등장하게 됐습니다.

Q.키마리는 시라세와는 다르게 특별한 배경이 없는데 캐릭터성이 독특하죠.

키마리는 일부러 리얼노선에서 살짝 벗어나 코미디 릴리프적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그려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친구인 메구미와의 관계는 묘하게 생생하기도 하죠. 이 자리에서 우주보다 먼 곳을 돌이켜보면 리얼과 판타지의 경계가 무척 막연해요. 남극관측대는 실제로 있지만, 작중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민간 관측대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고생이 남극 관측대에 참가하는 전개도 현실에서는 힘들테지요.

그런 설정을 포함해서 본작은 리얼과 판타지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었는데 키마리는 그런 작품성을 내포한 존재라고 할까요? 최초의 주인공이었던 시라세의 무거운 배경이나 귀찮은 성격을 잘 감싸안아 작품세계에 이어붙이는 '접착제' 같은 존재였어요. 시라세 뿐만이 아니라 히나타가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는 배경이나 유즈키 마음속의 고독도 의외로 무겁죠. 그같은 갖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는 캐릭터들을 중심에 있는 키마리가 포근한 공기로 전부 감싸안아주고 있어요.

특히 4화에서 남극행 훈련을 하는 대목에서 키마리의 존재감이 잘 드러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키마리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성립하지 못했을거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Q.히나타는 어땠나요

강렬한 개성을 지닌 키마리나 시라세에 지지 않을 캐릭터성을 가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두사람과는 차별화를 꾀하면서 만들었습니다. 키마리나 시라세보다 정신연령은 살짝 위고, 평소에는 의도적으로 익살을 떨 만큼 점잖은 마음을 가진 아이. 다만 이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왜 이 아이는 내면이 어른스러운가'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전부터 쓰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아이'라는 설정이 나중에 추가됐습니다. 모 아이돌물 작품 때도 제안은 해봤는데 '아니 그건 좀...'이라며 기각당했는데요 마침내 염원을 이루었습니다.

Q.확실히 이야기가 무거워질만한 설정이긴 하네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사회적 약자로 파악해버리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생활을 포기했더라도 다른 길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잔뜩 있기 때문에 시청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Q.그러면 유즈키는 어떤 캐릭터로 설정하셨나요

네번째는 '모두의 여동생격인 존재'이자 키마리가 귀여워할 수 있는 아이를 두고 싶어서 연하 캐릭터인 유즈키를 준비했습니다. 시라세나 히나타의 배경이 다소 시비어했기 때문에 유즈키한테 살짝 판타지한 설정을 넣어 중화시키고자 '인기 탤런트'라는 설정을 가미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 도중에 춤추고 노래하는 식으로 유즈키의 아이돌적인 측면을 그릴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평범한 유즈키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었다는 실감이 들었기 때문에 아이돌 방면으로는 이야기가 굴러가지 않게 했습니다.

너무 그쪽을 밀어주면 모에 애니 방면으로 탈선할 것 같았거든요....이시즈카 감독이 '모에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명확한 방침을 내려주셨기에 캐릭터에 스폿을 맞추거나, 주고받는 만담의 재미 같은 모에 애니의 장점은 남기면서도 소위 모에 애니로 분류할 수 없는 감각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 점은 이시즈카 감독한테 명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 것 같아요.

Q.구성에 관한 질문인데 여고생이 남극에 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치고는 좀처럼 남극에 도착하지 않는 게 의외였습니다.

말씀대로 3화 언저리에서 남극에 도착해 남극에서의 특별한 생활을 그리는 게 재밌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여자가 특수한 직장에서 일을 하며 분발하는 <시로바코>의 남극판 같은 이미지였죠. 하지만 남극 관측대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 일을 수행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서 도저히 여고생이 감당할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남극 관측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주인공을 사회인으로 설정하거나 대원을 전부 여고생으로 삼지 않고서야 남극 관측대의 중심이 되어 일을 하는 과정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리얼한 구조로 보자면 여고생이 남극관측대의 일을 하는 건 역시 어려웠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럼 남극 관측선을 타지 못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어떻게 해서 배를 계속 갈아타 남극까지 가는 얘기로 할까'처럼 극단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어요.(웃음)

최종적으로 지금의 노선으로 정해진 다음에도 키마리 일행과 어른들이 엮이는 방식에는 엄청 신경을 썼습니다. 우주보다 먼 곳은 남극으로 가는 여행이 축에 놓여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여행을 통해서 그려지는 그녀들의 성정과 우정이야기'거든요. 어디까지나 그녀들의 시선에서 남극관측대의 어른들이나 배에서의 생활, 그리고 남극의 땅을 그려야만 합니다. 6화까지 쌓아올린 그 아이들만의 세계를 어른이 나왔다고 해서 무너트리면 안 됩니다. 그점은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Q.말씀대로 키마리 일행 여고생팀과 관측대의 거리감은 절묘했습니다. 관측대의 캐릭터를 그릴 때 염두한 점은요?

힘든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정신과 육체의 터프함이 전달되도록 묘사할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실제로 관측대 사람들을 취재한 게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남극까지 가는 항해나 기지에서의 에피소드, 업무들을 듣다보면 제 상상을 훨씬 웃도는 터프함이 있구나 생각했기 때문에 키마리 일행이 대원을 볼 때도 그 이미지를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동시에 가혹한 환경 아래 장기간, 모두가 일치단결해 협력해야만 하기 때문에 설령 여고생이 상대일지라도 똑같은 남극 관측대원인 이상 동등한 동료로 다루겠거니 생각했어요. 키마리 일행도 어린애가 아니라 대원의 일원으로 취급해주는 편이 기쁠거고 시청자가 보기에도 그편이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서 7화에서 카나에의 입을 빌려 명확하게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Q.시라세가 남극을 목표로 한 동기는 모친이 행방불명이 된 것에 의한 상실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극에 도착한 순간 제일 먼저 꺼낸 말이 '꼴좋다!'였던 건 왜죠?

이야기의 중핵은 '시라세가 모친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였고 그건 자신이 보낸 무수한 메일을 수신하는 걸로 결착을 맺는다고 제작 초기단계부터 정해놓고 있었지만...9화 시나리오를 쓸 때 남극에 첫발을 내딛은 시라세의 첫마디가 '꼴좋다!'였던 건 거의 무의식으로 쓴 겁니다. 

시라세라면 남극행을 진지하게 생각한 자기를 바보 취급해왔던 놈들을, 그 모두를 향해 '꼴좋다!'고 말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어라, 엄마에 대한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싶고(웃음) 왜 남극에 간다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했는데 엄마를 떠올리지 않는가. 저도 의뭉스러워서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12화 서두의 모놀로그의 감정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저 도착한 것만으로는 시라세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리가 없다. 만약 내가 시라세였다면 분명 그럴 거 같았어요.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꾸고, 언제까지고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요. 그로부터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꿈은 이어지고 있어요. 그 감각은 남극에 도달한 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메일을 볼 필요가 있구나. 처음에 내놓은 대답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Q.이야기의 흐름 운운이 아니라 캐릭터의 마음을 우선해 대사를 선택했더니 '꼴좋다!'가 됐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시나리오 회의에서 아이디어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이시즈카 감독은 곧잘 '캐릭터한테 물어볼까요?'라고 말하는데 감독도 나도 자신의 주의주장을 작품에 담기보다는 '이 아이들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마음이 강하죠. 키마리 일행의 여행을 보고 즐겨주면 충분하다고요.

Q.그렇군요. 메구미가 최종화에서 북극에 가있다는 결말도 캐릭터의 심정을 우선한 결과인가요?

키마리가 남극에 가는 걸 결심한 이유는 메구미와 진짜 친구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사람의 관계에 어떤 결말을 부여해야 할까. 메구미의 성격으로 보건대 남극에서 돌아온 키마리를 향해 평범하게 '어서와'라고 말하지는 않을테죠. 메구미가 키마리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서 남극에 간 키마리와 대등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건 키마리에 대항해서 북극에 갈 수밖에 없을테고 그게 가장 메구미답겠구나 생각했어요. '(집에) 돌아왔어'라고 말하는 키마리를 향해 '안됐네. 나는 지금 북극이야'라는 문자를 보내는 걸 썼을 때 저부터가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웃음)

나중에 '남극에서 오로라가 보일 때는 북극에서도 보인다'는 얘길 듣고 무척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키마리와 메구미는 남극과 북극, 지구의 끝자락에서 같은 오로라를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Q.작중에서 마음에 든 장면은 어디죠?

제가 상정한 것 이상으로 멋지게 완성시켜준 장면은 잔뜩 있지만 특히 12화의 라스트신에서 남극에 해가 지는 장면은 인상깊었어요. 서두의 남극 경치는 시나리오에서도 적어놨지만 마지막 장면은 각본에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완성된 영상을 봤을 때는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2화 가부키쵸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 그건 제 실체험이 기반이 된 겁니다. 옛날에 국철최후의 날 한정으로 국철 전노선의 자유석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감사의 프리표'란 게 발매된 적이 있거든요. 그걸 써서 고향인 센다이에서 토쿄까지 친구랑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가부키쵸에 갔더니 무서운 사람들이 좇아와서 전력으로 도망쳤죠. 엄청 두근두근거렸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내 청춘의 한페이지였습니다. 키마리 일행의 추격전은 작화가 무척 좋아서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Q.기획 단계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 봤을 대 각별히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요?

전부 마음에 들지만 굳이 뽑자면 시라세일까요?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 취직활동을 일절 안 하고 알바로 100만엔을 모아 시나리오 라이터가 된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 100만엔이 떨어지면 내 시나리오 라이터 인생은 끝이다는 각오로 생활했기 때문에 무언가 목표를 위해 100만엔을 모으는 소녀는 애착이 갑니다.

Q.하나다 씨의 실제 경험이 담긴 갖가지 에피소드도 우주보다 먼 곳의 리얼 노선을 지탱해주고 있군요.

실제로 각본을 쓸 때는 딱히 의식하지는 않지만요. 방송후 조금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그러고보면 이거, 내 체험담이잖어'싶죠.(웃음) 나에 관한 건 가능한 작품에 반영하지 않는 방침이지만, 내가 가진 걸 전부 끄집어내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도 시나리오를 쓰면서 키마리 일행과 함께 남극까지 여행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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